여행기

화성행차를 따라서 (4) 남대문

멍탐정고난 2023. 8. 28.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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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층건물에 에워 싸여 위엄을 찾기 어렵지만 백년 전만해도 주위에 나직나직한 집들 밖에 없었으니 엄청 크게 느꼈던 모양으로 남대문이 돈짝 만하게 보인다는 말이 다 생길 정도였다.

남대문 옛사진

 

남대문은 도성(都城)의 상징이요 옛길 중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의 시발점이다. 현판에는 숭례문(崇禮門)이;라 쓰여 있으니 3편 글에서 이야기 한대로 오상(五常) 중 남방(南方)에 해당하는 예(禮)를 넣어 지었으니, 옛날 사람들은 이름만 듣고도 남쪽에 있는 문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현판글씨는 설이 구구하나 양녕대군이 썼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글씨를 세로로 쓴 것은 숭례(崇禮) 두 글자가 위 아래로 있으면 불꽃을 뜻하기 때문에 관악산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서 라고 한다. 글자를 그렇게 세로로 쓰면 왜 불꽃이 되는 지는 묻지 말도록!

 

필자(筆者)에게 묻고 정한 것이 아니니 ^^

 

그러나 결국 2008년 2월 10일 저녁 70대 남성 채종기가 방화를 저질러 소실된 것으로 보아 불꽃이 너무 크게 타오른 것인가?

화재현장
어처구니없는 범행을 저지른 채씨는

 2006년 4월 26일에는 같은 이유로 창경궁에 불을 질러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300만 원을 선고받은 적도 있었다. 즉, 문화재방화가 처음이 아니다! 원래 종묘에 불을 지르려 했는데 경비가 삼엄하여 표적을 숭례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문화재를 계속해서 방화한 까닭은 경비가 허술해 접근하기 쉽고 인명피해가 나지 않으며,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반성의 기미도 없었던 추악한 노인이었다. 범인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지난 2018년 만기 출소했다. 

 

심지어 5년만인 2013년 복원되었지만, 복원과정에서 끝없이 부실논란이 이어져서 결국 재료를 빼돌린 비리책임자들에게 배상판결도 이뤄지게 된다. 아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국보1호가 불에 타는 걸로 모자라 복원하는 과정에서 비리? 정말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이긴다.

 

2005년 11월 석축 하부 시굴 조사를 하다가 현 지표 보다  1.6m 아래 석축의 지대석 , 성문의 지도리석을 발견하였다.

옛날엔 지금보다 성문이 더 높았다는 것이다. 현장 설명문에는 19세기 말 전차선로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써있다.

전문학자는 아니지만 고적을 실증적으로 열심히 조사하며 오마이뉴스에도 자주 글 올리는 이순우 씨라고 있다. 이 분이 남대문 옛날 사진과 면밀히 대조한 후 구한말 남대문이 지금과 비례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글을 썼다. 즉 조선 초기 남대문 세울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땅속으로 1.6 m 묻히게 된 것은 근년이 아니라 상당히 오래 된 것이라는 이야기로 필자(筆者)도 이에 동조한다.

남대문 1895년

옛사진을 보아도 오늘날과 비례가 큰차이가 나지 않는다. 1.6m라면 성인여성의 키정도로 이정도가 낮아지려면 비례상의 차이점이 누가 보아도 발생해야한다는 말이다.  

 

남지(南池)

 

수선전도를 보면 숭례문 옆에 남지(南池)라고 쓰여 있다.

남지에 대하여 이규태 씨 글 일부 빌어 온다.

 

.1896년 4월 11일자 독립신문 잡보란에 난 기사를 읽어본다. 남대문 밖 아침시장에 어떤 사람이 고니(白鳥) 한 마리 잡아왔는데 그 마을 사는 이가 10냥을 주고 사다가 남대문 앞 연못에 넣어주었다. 한데 연못의 고기들이 좋아하여 고니는 날아갈 생각을 않고 주야로 노니는데 …… 중략 (中略)

 

한명회가 상소하기를, 한양 정도 때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남대문 전에 못을 파 남지(南池)라 일컬었는데도 불이 끊이질 않자 백성의 관심 밖에 나서 메워왔다 하면서 복원할 것을 상소했다. 하략(下略)

 

남대문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던 듯 한데서울시에 그 표석을 남대문 로터리 남서쪽 코너에 세워 놓았다.

남지표석 위치

서울역

 

전에 독일 갔다가 현지 교포들이 프랑크푸르트 본역 (Hauptbahnhof)을 서울역(구역사 현 )이라 부르는 것을 들은 적 있다. 생긴 것이 진짜 비슷한 데 (규모는 저쪽이 훨씬 크다. 기차 타고 내리는 플랫폼-독일어로 글라이스 (Gleiss)가 서울역은 몇 개인지? 프랑크푸르트 역은 삼십 몇번 까지 기억함 하나에 양쪽으로 타고 내리니 구내에 60여 열차편성을 한번에 댈 수 있음알고 보니 1925년 그전 남대문역(구역사)을 새로 크게 지을 때 프랑크푸르트 역을  벤치마킹 했다고 한다.

 

구 서울역사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사

 

커피를 마시고 서울역 청파로 쪽 출구로 나서니 11시 40분이다.

 

(이상-4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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