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화성행차를 따라서 (3) 종루와 광통교

멍탐정고난 2023. 8. 24.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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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10시 10분 이문설농탕을 나왔다.

 

종루(鐘樓) (종각(鐘閣) 또는 보신각(普信閣)

 

지금은 광화문 네거리가 서울의 중심, 도로원표가 있으니 대한민국의 기준점이지만, 조선시대 도성의 중심은 종루 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

鐘樓 在都城中央   종루는 도성 중앙에 있다.

構爲二層 이층으로 되어 있고, 樓上懸鐘  누위에 종을 달아서

以警晨昏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태평로-세종로 길은 대한제국-19세기 말부터 생겼고 조선 왕조 때는 남대문에서 신세계 앞, 명동, 광교를 거쳐 종루로 들어 왔다.

 

오늘 날 도시계획은 길을 퀭하게 뚫어 이리 저리 사통팔달 연결하는 것이나 옛날에는 그렇게 하면 기()가 흐트러지고, 적이 침입 할 때도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위 세종실록지리지 인용대로 조선 초기에는 2층이었으나 임란(壬亂)때 불타고 우여곡절이 있다가 고종 때 단층으로 짓고 보신각이라 하였다.

보신각(普信閣)이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니 옛날엔 모든 것을 오행설로 푸는 관습이 있어 이를 표로 만들어 본다.

 

오상(五常) () () () () ()
오행(五行) () () () () ()
오방(五方) () (西) () () 중앙(中央)
오색(五色) () () () () ()

 

이 표로 도성의 사대문 이름을 살피면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문은 숙정문(肅靖門: 靖은 智와 통한다고 함)인데, 마지막으로 정 중앙 종루에 신()자를 넣어 보신각 (普信閣) 이라 하니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완성된 것이다.

 

() 와 각()

 

위 옛 한말 사진을 보면 단층이고 이름도 보신각-끝에 각()이 붙는 것이 적당하나, 1979년 재건할 때 조선 초기처럼 2층으로 만들었으니 이름을 ()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창덕궁 주합루 1층에 규장각 현판이 있는 것처럼 이층 일 때 그 일층에 ()을 붙일 수는 있으나 이층 건물 자체는 기본적으로 루()가 마땅하다는 것이다. (옛날 건물엔 2층과 1층 현판이 다르고 심지어 같은 층에도 부분에 따라 다른 현판을 걸곤 했다.)

글쎄… 맞는 이야기긴 하나…그렇다고 사람들 입에 다 익어 버렸고 또 지금 와서 저 현판을 떼 내는 것도 거시기 한 것 아닌지지금 보신각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라고 한다.

 

대원군 시절 전국 방방곡곡에 척화비 세울 때 종루 앞에도 세웠던 모양이다.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측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척화비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상징이고, 개화파가 모조리 친일파로 변신해 역적이 되었을 때,  위정척사파는 끝까지 싸우며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쳤으니 우리 역사의 한 시기 분명한 역할을 하였으나, 척화비 문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논리를 너무나 단순화 시켰다.

 

오늘 날 돌아 가는 것 보면 척화비 생각날 때가 가끔 있으나 더 이상 정치적 의견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광통교 (廣通橋)

 

종루를 떠나 광교로 가는 길을 수선전도로 본다.

광교 가기 전 수선전도에서 주위를 잠깐  살피니, 종루 건너편 지금 영풍문고(? )쯤에 전옥(典獄), 또 전옥 건너편 (신신백화점-지금 제일은)에 의금부 글씨가 있으니 이 일대가 원래는 만만찮은 곳이었던 듯.

 

전옥(典獄)에서 오른 쪽으로 더 가니 우포(右捕)-우포도청 글씨가 먼저 2편에서 이야기 한대로 지금 광화문 우체국쯤 되는 곳에 써 있다.

 

다시 광교로 가서….

 

남대문-종루로 이어지는 도성의 중심축에 걸린 데다가 주위에 시전(市廛)이 있으니 청계천 여러 다리 중 가장 중요한 다리가 광통교 였다광교-광통교라 이름 붙은 것은 길이(약 12m)보다 폭(약15m)이 넓기 때문이다.

 

일제 때 청계천 복개하면서 하수도 속에 사라졌다가 지난 청계천 복원 때 햇빛을 다시 보게 되었으나  광교는 서울 도심의 남북을 잇는  주요 가로니 그 자리에 옛날 다리를 갖다 걸어 교통을 전부 마비시킬 수는 없는지라,  200 m 상류에 옮겨 복원 할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위 사진은 원 위치 보다 200 m  상류에 복원 된 광통교다.

 

중요한 다리답게 석물의 치장도 볼만 한데 태종대왕이 이를 갈던 의붓어머니 즉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神德王后) 강()씨의 릉-정릉의 신장석을 헐어다 쓰며 그나마 뒤집어 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태종 이방원의 더러운 뒤끝을 짐작케 한다. 

 

사실 조선의 왕들 가운데는 정말 인성이 파탄난 왕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시리즈도 생각해봄직하다.

 

위 사진 : 중앙 돌의 인물상이 뒤집혀져 있다.

 

경진지평(庚辰地平) 계사갱준(癸巳更濬) 기사대준(己巳大濬)

 

이런 글씨들이 광통교 다리에 새겨져 있다.

광통교 교각의 글씨 : 경진지평

 

 

앞 두 글자들은 각각 간지(干支)이고, 준()은 ‘개천을 깊게 파서 물길을  뚫는다는 뜻’ 으로 대략 준()과 서로 통한다.

 

조선 왕조 내내 개천 (청계천)에는 별 다른 준설작업이 없었다. 국초(國初)에 인구가 많지 않고 주위 산에 나무가 그득할 때는 그런대로 지냈으나, 후기에 한양성과 주변-성저(城低)십리 인구가 이십만 가까이로 늘어나고 산도 헐벗자 조금만 비가 오면 장안이 물에 잠기게 된다.

 

이에 영조 36년 경진년 (1760 년) 에 대규모로 개천(開川)  준천(濬川) 을 행하고 광통교 다리에 경진지평(庚辰地平) 글씨를 새기니, 앞으로 이 글자가 다 보일 정도로 바닥을 열심히 쳐 내야 한다는 뜻이다.

 

계사갱준, 기사대준 글씨도 그 뒤 계사년, 기사년에 역시 준천을 하고 앞으로는 그 글씨가 다 드러나 보이게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위 사진은 광교 네거리다. 저 신한은행 건물이 원래 조흥은행 본점으로 지금은 그저 그런 건물 중 하나지만 60년대 초반에 새로 지었을 때는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신한은행 옆에 붉은 벽돌에 백색 트림이 들어 간 꽤 괜찮은 건물이 있다.

 

기둥은 이오니아 양식에 양 날개에는 바로크 풍 돔이 있다. 광통교 가까이 있어 ‘광통관’ 이라 이름 붙은 저 건물은 옛 대한제국 시절 1909년 세워져 천일은행으로 쓰였다. 지금은 우리은행 지점이 들어 있다.

 

소광교 (小廣橋)

 

수선전도에 광교는 대광교(大廣橋)라고 써 있고 그 옆이 다방동(茶房洞)이니 곧 다방골 현재 다동이다.

 

다시 대광교(大廣橋) 남쪽에 소광교 (小廣橋)란 글씨가 있는 데 정동, 소공동에서 나오는 물과 호현동(현 회현동)과 상동에서 나오는 물길이 소광교 근처에서 합수하여 청계천 장통교로 흘러 간다.

(수선전도 중 소광교 부분)

 

이제 소광교의 위치를 추정해 본다. 복개는 되었지만 물길 위에 건물을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니 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광교에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 위 수선전도 물길과 비슷하게 생긴 길을 찾아 보았다.

 

광교에서 조금 내려오면 청계천 쪽으로 비스듬히 갈라 지는 길이 있으니 바로 삼각동 일대다. 그 길 아래가 물길이고 소광교는 길 입구쯤 일 것이다.

 

위 사진 앞쪽 도로에 소광교가 있었을 것이다 

 

명동과 상동

 

대왕의 행차는 소광교를 지나 명동(수선전도에도 명동으로 나온다) 낙동, 수교로 간다. 수선전도에 낙동(駱洞)으로 적힌 곳이 대략 지금 중국대사관 부근이 아닐까 하며 그렇다면 그 건너편이 현재 한국은행이다.

한국은행 구관 (현 화폐박물관)

이 건물은 1912년 르네상스식 프랑스 성곽 외관을 본 떠 일본인이 세운 것으로 일제 당시 조선은행으로 쓰이다가 해방 후 한국은행 본점이 되었다.

 

수선전도를 다시 보니 소공동은 옛날도 소공동이고 , 남별영(南別營)은 지금 조선호텔 이다. 상동(尙洞) 이라 쓴 곳은 지금 상동교회 부근일 것이고 선혜창(宣惠倉) 은 남대문 시장이다. 창()이 있으니 그 아래가 창동(倉洞)이다. 수교(水橋)는 전에 서울시경이 있던 곳인데 지난 일요일 보니 일본풍 술집에 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이렇게 남대문 까지 오니 12월 10일 일요일 오전 11시로 돈화문 떠난 지 2시간이 지났고 정조대왕의 행차보다는 약 3시간이 뒤지지 않았나 한다.

 

 

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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