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창의문(彰義門) 지네와 닭

멍탐정고난 2023. 9. 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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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都城) 4소문 중 하나인 서북문으로 백악(=북악)과

인왕산이 만나는 잿마루에 있다. 문을 내려가 홍제원(지금 홍제동) 쪽으로

가면 옛 의주대로와 통한다. 의주대로는 옛  6대로 또는 8대로 중 중국에

이르는 길이라 가장 중요했다. 의주대로로 갈 때 공식 행차야 서대문으로

나가겠지만, 민초(民草)들은 창의문이 지름길이었다. 지금도 홍제동 쪽에서

도심으로 올 때 이쪽이 빠르고 덜 복잡하다.

 

창의문을 자하문(紫霞門) 이라고도 불러 언뜻 불교를 떠올릴 지 모르나

그건 아닐 것 같다. 고어(古語)에 성(城)을 ‘잣’이라 했으니 창의문 아랫동네

사람들은 성문을 ‘잣문’이라 불렀을 텐데 이 ‘잣문’을 아화(雅化)하여 자하문

(紫霞門)으로 적었을 것이다. ‘자문’이라고도 하니 ‘잣문’ 설을 뒷받침한다.

 

 

창의문의 닭

 

창의문 홍예 가운데에 조각이 있다.

창의문 홍예 조각. 용은 아니고 새가 분명한데 닭인지 봉황인지?

홍예 안 천정에도 새가 그려져 있다.

홍예 천정화. 봉황일 수도 있지만 어째 도리탕이나 동양화 똥광에 있는 새와 닮지 않았는가? - 봉황은 닭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니, 봉황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필자는 보지도 못한 봉황보다 닭 쪽에 손을 들고 싶다

다른 문에는 용이 그려져 있는데 창의문과 혜화문에는 새다.

혜화문에는 성 밖의 새 피해를 막기 위해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창의문에 왜 닭을 그렸을까?

엠파스 백과를 찾으니 창의문 밖이 지네 형상 같아 그 기세를 누르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을 새기고 그렸다고 한다. 풍수에서 산의 모양이나

물의 흐름 따위를 동식물, 사람 또는 기타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을
형국(形局)이라고 하니 형상보다는 ‘형국’이 맞겠다.

 

구글로 본 창의문 밖.

형국이 왜 지네 같은지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능력 밖이다.

 

겸재의 세검정(洗劍亭)

 

영조24년 (1748) 경, 종이에 담채,  61.9 x 22.7cm, 국립박물관소장

지네 관계는 모르겠으나 겸재 그림으로 보듯 창의문 밖은 절경이었다.

 

 

닭 또는 지네가 창의문에 들어오다

 

1623년 3월 23일 새벽

인조반정군이 창의문으로 들어오니 이들이 과연 닭인지 지네인지 ?

스스로 창의군(倡義軍)이라 하였으니, 의(義)를 드러내는(彰) 문으로

의를 북 돋고 인도하는(倡) 군대가 들어 온 셈이다.

 

창의문(彰義門)은 서북에 있고, 오상(五常)-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義)가 오행(五行)상 서방이라 의(義)를 넣은 것이다. 서대문을 돈의문

(敦義門 또는 새로 생겼다고 새문), 서소문을 소의문(昭義門)이라 한 것과

같은 원리다.

 

그게 어떻게 창의(倡義)냐 쿠데타 반란군이지는 필자에게 따질 일이 아니다.

이름을 필자가 지은 것이 아니니. 또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여당 야당, 노론

남인 할 것 없이 그 거사를 창의(倡義)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지네로 여길 축-대북(大北)은 멸문지화를 당해 씨가 말라 버렸으니까.

아무튼 훌륭한 임금 광해군을 내 쫓은 반란군이라면 지네, 의로운 군대라면

닭이라 여기면 되지 않겠는가? 필자가 왜 지네를 ‘불의’ 쪽으로 모는지는

별 다른 근거 없고 징그럽게 생겨 그런 것 뿐이다.

지네 엄마에게는 지네가 사랑스러울 테지만.

 

비슷한 일은 계속 일어나더라 !

 

필자는 다른 글에서 역사에서 같이 일이 또 일어나는 반복은 없지만

비슷한 일은 일어난다고 한 바 있다. 인조반정 과정을 보면 기시감(旣視感)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분이 든다.  바로 5.16 과 꼭 닮았다.

 

가치중립적으로 쿠데타 지만 1961년엔 혁명(革命), 1623년엔 창의(倡義)였다.

 

5.16 주력은 나이로는 1기, 2기와 큰 차이가 나지 않으나 진급이 늦어

하늘과 땅인 8기 중령 들이 인사에 불만이 많고 자칫 옷을 벗을 박정희를

추대한 것이라면, 1623년에는 대북 집권 아래 야당생활에 지친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편승하여 친동생이 역모 누명을 쓰고 죽은 능양군을 추대했다.

 

이서와 신경진이 먼저 대계(大計)를 세웠으니, 경진 및 구굉,구인후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속이었다. 이에 서로 은밀히 모의한 다음, 문사 중 위엄과

인망이 있는 자를 얻어  일을 같이 하고자 하였다. 곧 김류를 방문한 결과

말 한 마디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드디어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곧

경신년(1620 광해군 12) 이었다. 그 후 경진이 이귀(李貴)를 방문하고 사실을

말하자 이귀도 본래 이 뜻을 두었던 사람이라 크게 좋아하였다. 드디어

그 아들 이시백, 이시방 및 문사 최명길, 장유, 유생 심기원, 김자점 등과

공모하였다. 이로부터 모의에 가담하고 협력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실록)

 

모두 서인에 1623년판 박정희-인조의 인척들이었다.

 

5.16 모의 때 정보가 여러 차례 새나가 위기를 맞듯이 인조반정도 그랬다.

 

이귀의 사람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일이 자주 발각되었다. 유천기가 모의를

알고 최곤(崔滾)에게 말하였는데, 최곤은 최유원(崔有源)의 아들로서 유희분과

친밀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희분이 자기와 친한 대간을 시켜서 이귀가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탄핵하여 국문하도록 청하였다.-연려실기술 중 하담록

 

5.16 전 방첩대에서 정보를 많이 수집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막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조 때도 마찬가지다. 광해 측근 김상궁 등에게 친분

또는 뇌물로 무마하는 한편 광해군도 당파싸움으로 여겨 심상히 넘겼다.

 

김자점이 뇌물을 주어서 김상궁과 은밀히 결탁하였으므로 김상궁은 그 억울

하다는 것을 힘써 변명하였다. 그 때문에 광해가 대간의 탄핵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탄핵이 정지되자, 이귀가 상소를 하여 대간과 조정에서 대질하여

무고죄를 밝히기를 청하였으나 광해가 또한 그만두었다. 연려실기술-하담록

 

 

5.16 세력이 동원한 병력은 6군단 포병과 해병대등 소수 병력이었고

인조 반정 때도 장단부사 이서 등이 동원한 불과 수백이었다.

 

이귀·김자점·한교 등이 먼저 홍제원으로 갔는데, 이때 모인 자들이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고….인조 실록

 

 

5.16 거사 마지막 순간에 방첩대에서 막고 또 박정희가 망설이는 것을

주위에서 북돋아 거사 집결지 6관구 사령부로 가는 장면이 있다.

 

이때 김류가 고변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앉아서 잡히기를 기다려

주저하며 나가지 못하였는데,  심기원이 원두표와 함께 그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찌 움직이지 않소?”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날 잡으러 오기를 기다릴 뿐이오.” 하였다.

기원이 말하기를, “그러면 장차 고스란히 잡혀간단 말이오? 마지막 지경에

이르러서 잡으러 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금부도사가 어찌 두려울 것이오.”

하였다. 김류가 옳게 여겨 … 연려실기술-연평일기

 

1623년 김류는 이렇게 해서 반군 집결장소 홍제원으로 간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그 유명한 말 ‘사이따마와 낭에라레따’

(주사위는 던져졌다)를 읊으며 새벽에 한강다리를 건넜다.

실은 카에사르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며 한 말이지만.

1623년 3월 23일에도 반정군은 새벽에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간다.

 

 3경에 창의문(彰義門)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관(宣傳官)

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를 만나 전군(前軍)이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에 이르렀다.-인조실록

 

 

모든 성공한 반란 또는 혁명에는 정부군-관군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5.16 때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이 혹시 자신이 추대되는 것 아닌가 싶어

협조하지 않았다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은 지금도 부인하지만.

1623년에 중요한 인물은 훈련대장 이흥립이었다. 임란 후 크게 키운 부대가

훈련원으로 도성 안 병력 거지 반이 이 부대였다. 이 인물 이흥립을

인조 측에서 친분을 통하여 미리 설득해 두었다.

 

…..(반정군이) 성중에 들어가서 북소리를 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 창덕궁

(昌德宮) 대궐 문밖에 이르렀다. 이흥립이 도감병(都監兵)을 거느리고 대궐

문 어귀에서 진을 치며 영을 내려 말하기를, “모든 군사는 내가 말머리를

돌리는 것을 보거든 활을 쏘라.” 하고는 끝까지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연평일기

 

이흥립은 반정 성공 후 계해정사공신 (1623년이 계해년임) 1등에 올라

출세가도를 달리지만 얼마 뒤 일어 난 이괄의 란 때 반란군 이괄에게

항복하여 나중 자살한다.

 

쿠데타 후에는 정통성을 어떻게 세우느냐가 중요하다. 5.16 때 윤보선 역할을

인조 때는 인목왕후가 한다. 이 부분은 필자의 다른 글 ‘목릉-선조’ 뒷부분을

참고하라. 다른 점은 5.16 때 윤보선은 그 유명한 말 ‘올 것이 왔다’ 하고

바로 협조하지만 인목왕후는 질질 끌고 애를 태워 인조가 석고대죄까지

하며 빈다. 윤보선은 군인들이야 바로 군대로 돌아갈 것이고 그러면 자기네

민주당 구파가 정권 잡겠지 생각한 것일까?

 

1968 년의 지네

 

1623년으로부터 345년 후 1968년 1월 21일

이번에는 새벽이 아니고 저녁, 지네 떼가 창의문에 몰려 온다.

김신조로 널리 알려진 북한 124 군부대 특공대 31명이다.

우리 때는 무장공비(武裝共匪)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뭐라고 하는지?

 

어쨌던 확실한 지네 떼다. 이미 문 옆 성벽을 헐어 길이 나 있었으니

정확하게 문을 지난 것은 아니나 개념상 지났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쓴 바와 같이 당시 우리 군은 나무꾼 형제 신고를 받고

침투를 알고는 바로 포위망을 쳤다. 그러나 이들의 산악행군속도가 시간 당

10km 나 되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에 친다고 친 포위망은 이미 이들이

지나간 지점 뒤였다.

  

1968년 1월 21일 저녁 김신조 일행은 계급장 없는 우리 군복 마치 HID나

방첩대 같이 꾸미고 창의문을 지나 대로를 행진하며 청와대 방면으로

내려 오다가 종로경철서장 최규식 총경이 검문하자 사살해 버린다. 마침

그때 시내버스가 헤드라이트 키고 나타나자 국방군 출동이 놀랍게 빠르구나

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까 넣어 애꿎은 시민들 죽이고 달아나기 시작한다.

 

수색이 시작되고 김신조는 생포 당해 티브이 나와 ‘나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하였다.

(반공의식 고취시킨다고 전향이 덜 된 상태를 일부러 내 보냈는지? )

나머지는 거의 사살 당하는데 몇은 살아서 이북으로 간 듯하다.

이 달아난 31명 잡는다고 당시 동원된 부대가 몇 개 사단인지?

아마 군단 병력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이 바람에 예비군 생기고….

사진 : 숙정문 탐방로에 있는 김신조 나무.

그 때 총구멍이 있다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들 찍는다.

 

김신조 때 필자는 고3 올라가는 겨울 방학이었다. 공비와 첫 충돌지점이

바로 필자 모교 옆으로 공비 일부가 필자 고등학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구내 교장 관사 다 부서지고 총소리에 놀란 숙직 선생은 이불 속에 숨고

대신 무슨 일인지 알아 보러 나갔던 경비원은 수류탄에 맞아 죽었다.

 

왜 그랬는지? 괜히 학교 건물에 대전차 지뢰를 던지는 바람에 우리 졸업

때까지 그 패인 구멍이 있었다. 저 소나무 총알 자국 정도 가지고 관광

코스 된다면 필자 모교 건물 벽에 난 대전차지뢰 자국도 놔 둘 것을 그랬다.

그림 :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창의문.

종이에 엷은 채색, 29.5 x 33.0cm,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이 그림은 현재 경복고 자리에서 올려다 보고 그렸을 듯하다……

작고 큰 바위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솔 숲이 우거져

있으며 골짜기 마다 개울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보기만 해도 한적하고

그윽한 느낌이 절로 일어난다. (최완수 선생 한양진경 중에서)

 

겸재 그림에는 문루가 있는 데 조선 태조 5년 도성을 쌓을 때는

문루(門樓) 없이 홍예만 있었던 모양이다. 인조 반정 118 년 뒤

1741년 창의군(倡義軍)을 기리기 위하여 문루를 세운다.

 

영조 16년( 1740 경신 ) 8월 1일

훈련 대장 구성임(具聖任)이 아뢰기를, “창의문(彰義門)은 바로 인조 반정

(仁祖反正) 때 의군(義軍)이 경유하여 들어 왔던 곳이니  마땅히 개수하여

표시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내년 봄에 개수하라고 명하였다.

 

계해정사공신록(癸亥靖社功臣錄)

 

영조 때 세운 창의문 문루에 1623년 계해년 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

이름이 적힌 현판이 있다.

1등 공신은 원래 10명이나 현판에는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최명길,

구굉, 심명세 의 7명만 있고 김자점, 심기원, 이흥립 셋의 이름이 없다.

이흥립은 앞서 설명대로 이괄의 난 때 항복하고 그 뒤 자살한다

 

김자점은 병자호란 때 용골산에서 올린 봉화를 중간에서 막고, 군대를 전부

산성에 넣고 평지를 비워 놓아 적을 무인지경 달리듯 하게 한 인간이나

그것은 잠시 귀양가고 때운다. 그 뒤 영의정까지 오르나 효종 때 권좌에서

밀리는 듯 하여 청나라에 우리 북벌계획을 알려 곤욕을 치르게 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는다.

 

심기원은 역모로 몰려 죽으나 누명인지 진짜인지 확실하지 않다.

 

2등 공신이던 이괄(李适)의 이름은 당연히 빠졌다. 벌벌 떨던 김류를 대신해

반정군을 지휘하던 이괄이 2등으로 밀렸으니 반란이 일어날 수 밖에

 

그러나 쓰레기 같은 인간 김류의 아들 김경징의 이름은 2등에 들어 있다.

(김경징에 관하여는 필자의 글 병자호란(2)와 그 뒷이야기(1) 참고하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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