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화성행차를 따라서 (2) 돈화로

멍탐정고난 2023. 8. 2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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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년 전  윤(潤) 2월 9일

정조대왕은 창덕궁에 사셨으니 6시 45분 이른 새벽에 길 떠났지만, 필자(筆者)야 집에서 오는 시간이 있어 돈화문 앞에 가니 일요일 오전 9시로 날씨는 매우 차나 사진 찍기 딱 좋게 맑게 개었다.

 

돈화문 (敦化門)

 

광화문 복원 글에도 월대(越臺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돈화문 앞에도 월대가 있었으니 다음은 동궐도(東闕圖) 중 돈화문(敦化門) 부분이다.

 

동궐도(東闕圖) 란?

국보제249호, 견본채색,  16폭 병풍,  각 폭 36.0x275.0cm

조선시대(朝鮮時代) 동쪽에 있는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함께 그렸기에 동궐도 (東闕圖)라고 한다.

동궐도 - 대조전 부근 확대도

- 일반 적인 풍경화와는 달리 투시도가 아니라 등각 투상도 형식으로 그려졌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예술적인 가치보다는 기록으로서의 궁궐연구에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등각투상도의 장점은 마치 설계도 같이 정확한 비례와 치수를 알기 편하다는 점이다.

그림에는 돈화문 지붕이 팔작지붕이나 실재는 우진각 지붕이다. 뭔가 화원(畵員)의 실수 인 듯 ?

 

월대(越臺) 존엄한 왕부(王府) 앞 눈높이 조정장치다.

 

경술년(庚戌: 1910년) 국치(國恥) 뒤 일제가 도시계획의 명목으로 도성의 대궐을 이리 저리 난도질 칠 때, 원래 하나로 묶였던 종묘와 창덕궁을 두 토막 내고 가운데 길을 내면서 월대(越臺) 따위는 없앴다가 근년에 창덕궁 복원하면서 이를 되살려 놓았다.

창덕궁 돈화문 전경

그러나 한번 훼손된 문화재 복원이란 얼마나 어려운지…..

돈화문 앞 광장 끝에서 월대는 그만 도로 밑으로 묻혀 버리니 괜히 허방을 파 놓은 느낌이 든다

(이 글을 처음 썻던 당시에는 위 사진과 같이 기존 율곡로와 도로높이가 같았고, 돈화문 월대와 인도사이에 약 1.5m의 옹벽이 서 있어 관람객들이 월대 계단을 통해 돈화문으로 오르는 게 불가능한 상태였다. 또한 마사토가 월대를 덮고 있어 먼지날림과 흙패임 등으로 관람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지난 2020년 월대 개선공사가 완료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제 인도에서 월대 계단을 통해 돈화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조선 후기 법궁 정문의 위엄이 느껴진다.)

공사 완료 후의 모습

대왕의 거둥은 돈화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종로- 옛 운종가(雲從街)를 만나 오른 쪽으로 꺾여 종루- 현 보신각(普信閣)까지 가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광통교를 건넜다.

 

수전전도 (고산자 김정호 제작으로 추정) 중 돈화문에서 종루와 광통교 까지

돈화로

 

비교적 잘 정비되어 일요일 아침 일찍 가면 옛 조선조의 정취를 그런대로 느낄 수 있다. 

 

을묘년 의궤에 대왕의 행차가 돈녕부(敦寧府) 앞을 지났다고 한다.

 

돈녕부는 임금의 친인척에게 뭔가 벼슬 한다는 느낌을 주나 실재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청으로, 지난 독재시절 대통령 친인척 관리하던 민정수석실에서 산하 무료급식기관을 만들었다면 비슷할 것이다.

 

정선방에 있고 어가가 그 앞을 지났다니 대강 그 위치가 돈화로 동쪽 어수룩할 때 홍어로 이름나 허영만 만화에도 나오는 순라길 앞쯤이 아닐까?

 

종로 3가에 가까이 오면 옛날 ‘로카’ 들이 꼬이기로 (Broker : 영어에서 브로커는 그리 나쁜 직업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기꾼과 같은 뜻으로 쓴다) 유명한 백궁다방이 있었다. 위 수선전도를 보면 대략 그 위치쯤에 좌포(左捕)라고 쓰여 있으니 한성부 좌포도청이다. 지금은 맨 귀금속 가게들 이다.

수선전도에서 보면 우포청 자리는 지금 동아일보-광화문우체국 근처 인 듯. 옛날 좌우(左右)를 방위개념으로 쓸 때 좌는 동쪽이고 우는 서쪽이다. 따라서 좌포청은 도성의 동쪽, 우포청은 서쪽에 있어야만 한다.

 

옛 백궁 다방에서 몇 발자국 내려와 종로 삼가 코너에 단성사 극장이 있다. 대왕 따라 가는 길에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단성사 옆 골목이 바로 그 유명한 종삼(鍾三)이었다. 

필자(筆者)가 조 골목을 처음 들어가 본 것이 중학교 1학년 때 다. 당시 학교에서 영화단체관람을 단성사로 갔는데, 멋 모르고 옆 골목에 빠지니 어린 눈에도 야리꾸리한 여자들과 건달 같은 남자들이 무언가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약간 열린 창문 틈으로 방안을 엿 보면 온통 발가벗은 여자그림이 걸려 있고.. 그런 골목인데..

 

그 중 한 여자가 솜털 뽀송뽀송한 이 중딩 모자를 냅다 낚아 채서는 어느 집으로 들어가며  ‘ 얘 놀다가 ! ‘ 하는 것 아닌가? 당시 노는 것이 뭔지 몰랐고 (으음 솔직히 말해서 대략 짐작은 했다 ^^) 또 그럴 돈도 없고.. 어찌나 난감했던지……

 

종삼(鍾三)은 1968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폐쇄시켰다. 

* 종삼은 1950~60년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홍등가 지역이었다.

 

종로(鍾路) (운종가(雲從街)

 

 

정조대왕의 행차는 돈화로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운종가를 따라 종루(鍾樓) 쪽으로 갔다. 나도 따라간다.

피맛골 (避馬)

 

대왕을 따라가는 것도 좋지만 슬슬 시장기가 들어 아침부터 먹어야겠기에 낙원동과 종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종로 길을 버리고 피맛골로 접어 들었다.

 

옛 운종가(雲從街) 대로를 나란히 따라서 좁은 골목이 있다. 대로에는 임금님 행차 아니라도 지체 높은 대감님들 행차가 잦아 걸핏하면 물렀거라 게섰거라 하는 통에 서민들로서는 여간 귀찮지 않고 도대체 길을 걸을 수 없다. 이를 피하여 옆 좁은 골목으로 다니는 것이 뱃장이 편하니 피맛골이라 한다.

예전 피맛골 길의 모습

* 아버지가 답사하실 당시에는 아직 피맛골이 남아 뒷골목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2012년 청진동 재개발로 인해 현대식 건물들로 채워지면서 피맛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문설농탕

 

종각 앞 옛 화신백화점까지 오니 종로에 직장 있을 때 자주 가던 설렁탕집 이문설농탕은 그대로 있다. 요즈음 이문동 하면 청량리 밖을 생각하여 종로2가에 웬 이문? 하기 쉬우나 우리나라 곳곳에 이문동 (里門洞)이 많다. 이문 (里門) 은 옛날 관청의 경계를 표시하는 홍살문이니 관아가 있는 동네면 이문동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재개발로 이전의 이문설농탕 집 전경

* 이문설농탕 역시 피맛골 재개발때 견지동에 위치한 현대식 조그만 가게로 이전했다. 기존에 쓰이던 100년 넘은 한옥건물은 등록문화재급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었으나 깔끔하게 밀려버리고 재개발되었다. 역시 재개발은 서울이지!!! 다 밀고 최신식으로 계속 지어라! 건설의 나라 대한민국!

견지동으로 이전한 모습

화신 뒤 골목에 이리저리 밥집도 많았고 또 김두한이 놀던 우미관도 있었는데 골목 전체가 뜯겨져 나가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설렁탕을 시키니 9시 50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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