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화성행차를 따라서 (1) 반차도

멍탐정고난 2023. 8. 2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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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795년 정조 대왕이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 (1735년생)의 주갑(周甲)과, 아버지와 동갑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回甲)을 맞아 아버지 무덤 현륭원과 화성을 찾는 행차를 따라 걷는 기행문이다.

다녀 왔다 하고 네 글자로 끝낼 수도 있겠지만 이것 저것 사설과 사진을 붙일 테니 꽤 여러 편으로 나뉠 것 같다.

임금이 능(陵)에 가는 것을 능행(陵幸)이라 하는 데 이때 사도세자는 아직 장조(莊祖)로 올리기 전이라 그 묘는 능 이 아니고 원(園)이니 (고종 때 추존(追尊)되어 지금은 융릉이라 부름) 이 글의 주제가 되는 행차는 능행이 아니고 원행(園幸)이고, 을묘년이니 을묘원행 이다.

1795년 을묘년 (乙卯)년 윤(潤) 2월 9일 오전 6시 45분

세 번째 북이 울리니 (삼취 (三吹) 임금의 거둥이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으로 나오는 데 그 행차모습을 장통교 옆 타일 벽화 반차도(班次圖)로 본다.  전체가 100 여 컷이 넘으니 그 일부만 소개할 수 밖에 없다. (거둥 : 한자로 거동(擧動)으로 쓰나 순 우리말로 보는 것이 좋겠다)

반차도(班次圖)에는 1,779명의 인원과 779 필의 말이 그려져 있지만 실재로 동원 된 인원은 6천 여명으로 모두가 어가(御駕)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화성에 먼저 가 있거나 길 중간 중간에 배치된 사람이 많았다.

조선조에서는 중요 행사가 끝난 후 의궤(儀軌)  만들었는 데 행사의 내역- 조직현황 경비사용 도구제작 동원인원 등 세부 사항이 총망라 되며 이 전체를 그림으로 나타낸 부분이 반차도다.

의궤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조선왕조 특유의 기록문화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약탈해 간 것이 바로 강화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류다. 따라서 반차도(班次圖)는 조선 후기 제작한 의궤(儀軌) 마다 다 들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즉 이 글의 주제가 되는 행사 의궤에 붙은 반차도는 부수를 여럿 만들기 위하여 목판으로 만들어, 그림이 흑백이다. 청계천 장통교 옆 타일 그림은 한영우 교수가 10여년 전 이 목판본에 채색을 더한 것을 대본으로 삼았으니, 복원과 창작의 중간쯤 이라 할 수 있다.

경기감사와 총리대신

임금의 행차를 맞는 화성을 관할하는 지방관인 경기감사 겸 이날 행차를 총괄하는 임시기구 정리소(整理所)의 정리사 (整理使) 중 하나인 서유방(徐有防)이 당연히 맨 앞에 나오고, 우의정 채제공이 정리소(整理所) 총책임자- 총리대신으로 바로 뒤에 있다.

이어 깃발부대와 악대가 나온다.

금군 (禁軍)

선구금군(先驅禁軍) 25인 마작대가 다섯 열을 지어 나온다.

나인(內人) 들

혜경궁과 정조대왕의 두 누이동생- 군주(郡主)의 시중을 드는 나인 (宮女) 18명이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타고 있다.

자궁의롱마 (慈宮衣籠馬)

혜경궁의 옷을 넣은 농 실은 말이 나온다.

정가교(正駕轎)

임금의 정가(正駕)가 나오는 데 이날 대왕은 정작 이 가마를 타지 않고 자궁(慈宮) -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뒤를 말을 타고 따른다.

수라가자(水刺架子)

혜경궁이 들 미음 등을 실은 마차가 나온다.

자궁가교(慈宮駕轎)

아버지 사도세자의 생일 1월 21일에는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지금 서울의대. 아직도 의대 구내에는 그 일부-함춘원 건물 잔해가 있다)에서 전배하고, 혜경궁의 생일인 6월 18일에는 창경궁 연희당에서 잔치를 따로 또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날 행차 명목은 어머니 회갑연을 새로 지은 성 화성에서 가지는 것이므로 그 주인공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의 가마가 무예청 별감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온다.

혜경궁의 가마는 이날을 위하여 새로 만든 것으로 정리의궤에는 어떤 종류의 장인 몇 명이 동원되어, 비용이 얼마 들고 그 스펙은 어떻다는 이야기가 그림과 함께 나오니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임금의 좌마(座馬)

자궁(慈宮)-혜경궁의 뒤를 정조대왕이 말을 타고 뒤따라 오는 데 무예청 별감과 협마순노의 삼엄한 호위를 받고 있다. 임금을 직접 그리지 않는 관례에 따라 말 위는 비어 두었다.

군주쌍교 (郡主雙轎)

정궁(正宮)이 낳은 딸은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은 옹주(翁主) 인데, 세자의 딸은 군주(郡主)의 칭호를 내린다. 사도세자의 두 딸 – 정조의 누이동생 청연군주(淸衍郡主) 와 청선군주(淸璿郡主)의 가마가 나온다. 이 가마도 이날을 위하여 새로 만든 것으로 의궤에 자세한 내역이 나온다.

두 누이동생은 동행하지만 정조대왕의 비() 효의왕후 (孝懿王后) 청풍 김씨는 이 날 같이 가지 않았다.

당시 영조대왕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경주 김씨가 있었는데, 나이는 며느리 혜경궁 보다 20년 이나 아래로, 손주며느리 정조비() 보다 몇 살 많을 정도 지만, 유교는 나이 따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육례를 갖추어 맞아 들인 부인이냐에 따라 부모 자식 명분이 지어지는 것이다.

혜경궁이 임금의 어머니라 하지만 빈궁인데 비하여, 정순왕후는 정비(正妃)니 지체로 보나 배분으로 보나 왕실에서 제일 어른이었다. (역사를 보면 이 정순왕후가 상당히 골치 아픈 인물이다.)

우리나라 법도에 할머니 혼자 놔두고 식구 다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니 손자 며느리인 정조의 비()가 보살피러 남아 있은 것이다.

장용영(壯勇營) 마작대(馬作隊)

장용영 마작대가 행진한다.

정조 대왕은 즉위 후 5영()과 별도로 장용영(壯勇營)을 만들고 기존 5영도 이 장용영에 흡수 시켜 버리니 곧 정조의 왕권 강화를 위한 친위부대 라 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울과 별도로 장용영 외영을 둔다.

반차도에 그려진 인원 합하여 을묘원행에 동원 된 총인원 6천 여명 중 4,500 명 가량이 호위병이고, 다시 그 중 3천명이 장용영(壯勇營) 군사였다. 

도승지와 각신

도승지(지금의 비서실장격인 벼슬이다. 임금의 최측근) 와 임금을 수행하는 문신들이 뒤 따른다.

난후금군과 총 든 군인들

난후금군과 

총 든 군인으로 반차도 그림은 끝이 난다.

참고자료 :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 한영우, 효형출판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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