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사자산 법흥사 (獅子山 法興寺)

멍탐정고난 2023. 8. 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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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수주면 사자산(獅子山) 자락 법흥사에는 신자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으니 바로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음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이란 ?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대신 불상을 모시지 않는 불전(佛殿). 부처님의 분신과 다름없는 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殿)이나 각()보다 상위개념 인 궁()이라 하였고, 그도 모자란지 하나 더 올려 보궁(寶宮)이란 이름을 붙였다. 보궁(寶宮)의 기원은 석가모니가 대각(大覺) 최초의 적멸도량회를 열었던 마가다국 가야성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비롯된다. - 이상 불교용어사전에서.

우리나라에는 5 적멸보궁(寂滅寶宮) 있으니, 영축산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이 정도 사전지식을 가지고 2006 6 18일 일요일 구봉대산(九峰臺山) 등산을 끝낸 뒤 법흥사(法興寺)를 배관(拜觀) 하였다.

일주문(一柱門)

절에서 금당(金堂) 멀찌감치 떨어져 일주문을 세운 것은 부처님을 뵙기 전에  먼저 세속의 번뇌를 깨끗이 씻어내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비단 불교 뿐 아니라 성질이 서로 다른 공간을 들어 갈 때 완충지대를 두는 것은 세계 어느 문화에서나 공통이다. 황차 속()에서 성()으로 들어 갈 때야……

그러나 현재 법흥사 일주문(一柱門)은 길거리 이정표-Land Mark 일 뿐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찾아 순례하는 불교도나 일반 등산객이나 몇 백 미터 되지도 않는 거리를 꼭 자동차 타고 들어가야 하는 지? 일주문(一柱門) 바로 앞에 커다란 주차장이 따로 있음에도! 

(門) 사이로 닭집이 보인다. 저 닭집 맛은 있다 ^^

금강문(金剛門)과 주차장

어느 절이나 일주문을 지나 호젓한 길을 걸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나면, 다락이 달린 문을 지나게 되어 있으니 우연이 아니라 눈높이 조정장치다.

다음은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생활사 상; 안길정 지음” 에서 빌려왔다.

금강문(金剛門 : 위 다락은 원음루 圓音樓 - 옛날 1, 2층에 거는 현판이름이 각각 다른 것이 보통이다) 을 비탈진 곳에 세운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바로 코앞 까지 쉥 하니 차 몰고 온 사람들에게 옛날식 장치가 먹힐까? 펼침막 걸어 놓은 것 보면 절 자체부터 개념이 없는 듯. 

다음은 3 년 전 찍은 완주 화암사(花巖寺) 우화루(雨花樓) 사진이다.

문루(門樓)의 쓰임새는 같으나 … 어느 쪽이 부처님 마음에 들까? 부처님 품이야 가이 없으니 (무량변(無量邊): 헤아릴 수 없이 넓으니) 상관하실 리 없지만, 필자(筆者) 는 인간인지라 신경이 쓰인다.

 적멸보궁(寂滅寶宮) 가는 길

 적멸보궁(寂滅寶宮) 부터 배관(拜觀) 하는 데, 본채 뒤로 약 6-700 meter, 느린 걸음으로 10분 정도 거리다.

이런 길은 시멘트 포장을 하지 않아도 좋으련만 !

적멸보궁(寂滅寶宮)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 유학하며 문수보살을 뵙고 부처님의 의발(衣鉢)과 진신사리(眞身舍利) 100과(顆)를 얻어 귀국했다. 

율사(律師)는 이 사리를 황룡사 9층탑과 울산 태화사, 통도사 금강계단에 나누어 봉안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통도사 금강계단 뿐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오대산 중대암,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에 나누어 봉안 했다고도 한다. 법흥사에는 뒷산 어딘가에 사리가 봉안되었다고 하여 뒷산 사자산  전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과연 적멸보궁 안에는 본존불을 모시는 대신 그 자리에 창이 뚫려 뒷산과 통해 있다.

부처님 열반하신지도 1,100 여년 지난 서기 600 여년 경에 자장율사(慈藏律師)는 어떻게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구했을까 ?

그러나 이런 식으로 따지는 것은 Fact 를 중요시 하는 역사(歷史)의 (場) 에서 생긴 버릇일 뿐,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이야기는 신화(神話)의 장(場)에 속한다.

신화(神話)의 시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 문수보살을 직접 뵙고 받았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장율사(慈藏律師) 석굴(石窟)

적멸보궁(寂滅寶宮) 뒤로 돌아 가면……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수행했다는 석굴(石窟)이 있다.

그러나 옆에 세운 해설판에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시대 석분(石墳)으로 되어 있다.

영월 법흥사 (法興寺) 석분(石墳) 강원도 유형문화재, 소재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이 곳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도를 닦던 곳이라고 전하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중략
돌널의 용도는 고승의 유골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며 돌방은 스님의 도를 닦던 곳으로 보인다. 지금은 화강암으로 단을 쌓아 들어갈 수 없다.”
중략 
돌널의 용도는 고승의 유골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며 돌방은 스님의 도를 닦던 곳으로 보인다. 지금은 화강암으로 단을 쌓아 들어갈 수 없다.

문화재 당국에서 세운 듯한 위 안내판에 관계 없이 절에서 세운 안내판이 부근에 하나 더 있다. 언뜻 보면 양자가 모순되니 둘 중 하나를 빼야 할 것 같지만 전자는 역사의 장, 후자는 신화의 장에서 본 것이다.

하수(河水=강물) 와 정수(井水=우물물)가 서로 넘보지 않듯이 (聖)과 속(俗)은 쓰는 언어가 다르니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적멸보궁에서 돌아 서는 데, 일행 총무가 핸드폰으로 독촉을 심하게 한다. 그러나 절 입구 금강문 부근에 징효대사비와  만다라전이 있음에야 !

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 (興寧寺 澄曉大師寶印塔碑)

흥녕사(興寧寺) 는 법흥사의 옛날 이름이요, 징효대사(澄曉大師) 는 신라말 고승이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파(獅子山門派)를 연 철감선사(澈監禪師) 도윤(道允)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 에서 선종의 법문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비석은 943년 고려 혜종1년 서기 943년에 세웠으며 글은 최언위(崔彦위) 가 짓고 최윤(崔潤) 이 썼으며 최환규가 새겼다.

내용은 징효대사가 평생동안 한 일과 신라 효공왕이 징효대사 라는 시호(諡號)와 보인(寶인) 이라는 탑명을 내린 것을 적었다고 한다.

만다라(Mandala) 란 ?

 

만다라(Mandala)는 산스크리트 어로 MANDA (본질) 와 LA (소유, 성취)가 합친 말이다. 우주의 본질 또는 생명의 진수가 가득한 원형의 바퀴를 뜻한다.
조화가 있는 완전세계 (COSMOS) 의 도식화로 기하학적인 도형을 이루며 각 도형에 신들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티베트 불교미술을 대표하며, 밀교(密敎) 의 행자(行者)가 명상을 통하여 우주의 핵심 즉 대일여래의 큰 생명력에 합일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안내도 이다.
 ....중략...
제일 바깥 원에는 청, 적, 흑, 백, 황 의 다섯색으로 타오르는 화염의 무늬를 묘사한다. 이것은 다섯 부처의 신체를 상징하는 신성한 색으로 외부의 적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후략

이상 안내문 요약으로…… 그럼 법흥사는 밀교(密敎)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밀교(密敎)

밀교에 해당하는 인도의 호칭은 바지라야나(vajra-yāna:金剛乘)인데, 이것은 후기 대승불교를 대표한다. 바지라야나, 즉 금강승 실재(實在)와 현상(現象)을 자기의 한몸에 융합하는 즉신성불(卽身性佛)을 목표로 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

이상 법흥사(法興寺) 배관기(拜觀記)를 마치며, 인터넷에 법흥사(法興寺) 적멸보궁(寂滅寶宮)에 대하여 아주 잘 쓴 글이 있어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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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 렬<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법흥사 적멸보궁은 뒷산 어딘가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고전하기 때문에 뒷산 전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에는 적멸보궁이라는 이름의 법당이 있다.

3칸 의 자그마한 규모이며 외관상으로는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건물이다. 그러나 내부에 들어가면, 불단 위에 응당 계셔야 할 불상이 없이 바깥으로 창만 뚫려있다.

이런 류의 법당구조는 통도사 대웅전에서도 볼 수 있었다. 통도사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이유는 창 밖으로 보이는 사리탑에석가세존의 진신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불상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흥사 적멸보궁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뒷동산의 유려한 곡선 뿐이다. 뒷산이 불상 대신 모셔진 것이다.

석가세존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라는 당시 마투라 족들이 지배하던 땅이었다. 대대적인 다비식을 끝내고 나니, 여덟 말에 해당하는 세존의 진골, 진신 사리를 수습할 수 있었다. 소문을 들은 주변의 일곱 나라 왕들이 몰려와서 사리를 나누어줄 것을 요청해 세존의 사리는 여덟 등분 되어 여덟 나라는 각각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니, 이를 근본 8탑이라 부른다.

세존이 계실 때는 가람도 경전도 필요 없었다. 세존이 머무는 곳이 바로 가람이요, 세존의 말씀이 바로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성의 종교지만, 일반 민중들은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성 구도는 철학적 종교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지식인에게나 가능하지, 지적 수준이 낮은 민중들에게는 난해하고 불가능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세존의 뼈와 정기가 화한 진신사리야말로 최고의 신앙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불교 초기에 일어났던 사리 전쟁은 자기 나라를 불교국으로 포교하려던 왕들의 전략적 목표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유명한 아쇼카 왕은 후대에 일곱 나라의 탑(스투파)에서 사리를 꺼내어 그가 세운 8만개의 탑에 골고루 나누었고, 사리신앙은 온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사리신앙을 전파한 이는 자장율사다. 중국에 유학한 자장은 종남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세존의 의발과 진신사리 100과를 얻어 귀국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이 사리를 황룡사 9층탑과 울산 태화사, 그리고 통도사 금강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 현존하는 곳은 통도사 금강계단 뿐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과 구전에 의하면, 자장은 여러 곳에 그가 가지고 온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했다고 전한다. 오대산의 중대암, 설악산 봉정암, 그리고 사자산 법흥사가 바로 그곳이라 한다. 또한 태백산 정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통도사 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이다.

이들 5개소에는 적멸보궁형의 법당들이 세워졌고, 이를 5대 적멸보궁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이외에도 대구 달성 용연사에도 적멸보궁이 있고, 사천 다솔사도 최근에 보궁을 만드는 등, 진신 사리와 보궁에 대한 신앙은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세존의 말씀은 교(敎)가 되었고, 세존의 마음은 선(禪)이 되었다. 교는 경전을 통해 기록되어 법보(法寶)가 되었으며, 선은 스님들을 통해 전해져서 승보(僧寶)가 되었다.

세존의 몸이요, 정신의 현현물인 진신사리는 불보(佛寶)가 되어, 삼보를 구성한다.

그 귀한 보물이니, 진신사리에 대한 열망은 대단할 수 밖에 없다. 법흥사 적멸보궁은 뒷산 어딘가에 사리가 봉안되었다고 전하기 때문에, 뒷산 전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어떤 인공적인 불탑보다도, 불상보다도 자연물은 위대하다. 세월이 지난다고 허물어질리 없고, 외적의 침입에도 도난당하거나 불타버릴 염려도 없다.

자장이 가져왔다는 불사리의 진신 여부에 대해 의심이 제기되기도 한다. 세존이 열반한 뒤 1000여년이 지난 그 때에, 그리고 이국인 중국 땅에서 어떻게 100과나 되는 사리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 어떻고, 사실이면 어떤가? 불보란 석가세존의 존재 자체이지, 뼈나 구슬과 같은 사리가 아니지 않은가? 물질인 사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장이 전해준 불보에 대한 신앙이 중요한 것이다. 사리는 단지 상징일 뿐이다.

법흥사 적멸보궁 뒷산은 사리신앙의 상징성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 거대한 산 속에 몇 톨의 진신사리가 흩어져 묻혀있다. 아무리 첨단 장비를 동원한다 해도, 이 산 속에서 사리를 찾는다는 것은 망망대해에 던져진 돌멩이를 찾는 것만큼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그러나 아무런 장비 없이도 우리는 쉽게 사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온 산이 부처의 몸이기 때문에, 뒷산에 널린 돌멩이 하나는 부처의 뼈요, 풀포기 하나는 부처의 모발이 된다.

법흥사 적멸보궁이 전하고 있는 뜻은 바로 이것이다. 그 좁쌀만한 사리를 왜 찾으려 하는가? 온 산이, 온 세상이 부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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