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선정릉 - 정릉(靖陵) - 중종

멍탐정고난 2023. 8. 16.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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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동 선정릉(宣靖陵)에는 필자가 먼저 글 ‘선릉’ 에서 소개한 성종(成宗)과 그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 뿐 아니라, 제 11대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이 또 있다.

사진 : 구글로 본 선정릉. 입구에 성종의 선릉이 있고 그 안쪽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건좌손향(乾坐巽向)-북서에서 남동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물괴'의 중종 (박희순 역)

* 중종은 연산군을 쫒아내고 집권한 조선의 11대왕이다. 연산군의 이복형제였으며 초기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에게 휘둘렸으며 이들을 견제하고자 그 유명한 "조광조"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해보려했지만, 그 조광조도 말을 안듣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훈구파와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파를 적당히 균형있게 견제하다가 여러차례 사화를 일으켜 옥사와 피바람을 일으켰다. 집권기 내내 이런저런 잡음이 컸으니, 이는 중종이 정통성있는 임금이 아니라 연산군을 폐위하고 올라간 허술한 권력기반과 공신집단, 그리고 새로이 부상하던 사림세력의 충돌로 인한 권력의 격변기 였기 때문이다. 드라마로 유명한 "여인천하"가 바로 이시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정난정, 문정왕후, 경빈 박씨 모두 이시기의 인물. 

중종(中宗)대왕에게는 배필이 셋 있었다.

첫 번째는 1506년 반정(反正-쿠데타)으로 중종이 즉위하자 역적 신수근의 딸이라고 7일 만에 폐비(廢妃)되어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신씨(愼氏)와 1 계비는 장경왕후 윤씨요 (章敬王后 尹氏 1491-1515. 인종(仁宗)의 어머니) 2 계비는 워낙 캐릭터가 강해 연속극에 단골로 나오는 문정왕후 윤씨다. (文定王后 尹氏, 1501-1565, 명종(明宗)의 어머니)

이렇게 왕후가 셋이나 됨에도 정작 삼성동 정릉(靖陵)에는 중종 대왕 혼자 홀아비 같이 묻혀있으니 그 사연을 간단히 적어 본다.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

폐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야 200 여 년 뒤에나 복위되니 합장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중종은 처음 제1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희릉(禧陵)에 합장되었다. (*) 희릉(禧陵)은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西三陵)의 세 능 중 하나.

장경왕후가 서삼릉으로 오게 된 사연도 기구하니 왕후가 승하한 처음에는 내곡동 태종대왕의 헌릉(獻陵) 옆 서쪽에 능침을 썼다.

실록 중종 10년( 1515 을해 ) 3월 23일 대행 왕비의 지문(誌文)

.......시호를 올려 장경(章敬)이라 하고, 중략(中略)… 현궁(玄宮)을 광주읍(廣州邑) 서쪽 헌릉(獻陵)) 의 오른쪽 건좌(乾坐) 손향(巽向) 언덕에 만들고, 윤 4월 신유일에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희릉(禧陵) 이라 하니, 후의 경사를 넓힌다는 뜻이다.....

희릉(禧陵)을 현 서삼릉으로 천장(遷葬)하다.

장경왕후 희릉(禧陵)이 현재 원당에 있는 서삼릉으로 옮겨 가게 된 배경에는 김안로(金安老: 1481-1537)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름이 안로(安老)고 호(號)가 희락당(希樂堂-호는 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이니 안분자족(安分自足)하는 고결한 선비 같지만 정치적 술수는 대단히 음험했다. 

김안로(金安老)는 문학적 소양이 상당했던 것 같다. 요즈음 정치인들이 너무 무식하다고 탄식하지만 교양이 풍부한 인물이 정치 잘하는 것은 아니다. 멀리 송나라 휘종은 뛰어난 화가며 당대 제일의 교양인이었지만 나라를 망쳐 먹고 자신은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 갔다.

우리나라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도 주옥 같은 시(詩)를 썼지만 정치행적은 실망스러웠다. 구한말의 민병석(전 대법원장 민복기의 조부)은 광화문 비각 글씨를 쓸 정도의 명필이지만 요즈음 친일파 재산환수 운운에 이름이 나온다.

다시 김안로(金安老)로 돌아 가, 정적을 제거하는데 바로 공격하면 다 눈치채게 되어 성과를 거두기 어렵고 아무 관계 없이 보이는 일을 슬쩍 들쳐서 그것이 돌고 돌아 정적에게 화가 돌아가게끔 해야 똑똑한 것이다. 김안로는 이 짓을 잘하여 조선조 역사에 간신(奸臣)으로 유명하다.

이 방면 꾀로는 중국인들을 당할 수 없다. 한 무제(漢 武帝) 때 요인(妖人) 강충(江充)은 누구를 직접 공격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 A가 B를 치고, B가 다시 C를, C가 D를, D가 E를, 최후로 E가 목표물을 공격하게 하니 전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아무도 몰랐고, 걸리면 그 누구도 성할 수 없었다. 심지어 황태자-여태자(戾太子) 마저 탄핵하여 결국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여태자(戾太子)가 죽기 전 강충의 목을 베긴 했지만.

김안로(金安老)가 쓴 방법이 우회 정도는 좀 약하지만  원리는 같은 것으로 우선 희릉(禧陵)에 문제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화제를 꺼낸다. 

중종 32년(1537) 4월 23일 실록(장경왕후를 헌릉 옆에 장사 지낸 지 22년 째)

김안로는 의논 드리기를, 무릇 산맥에 돌이 있는 곳은 습기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물이 날 염려가 있으므로 일반 사람들의 묘지를 쓸 때에도 깊이 꺼리는 법입니다. 당초에 능을 만들 때에 제조·낭관 등 감독하여 살핀 자가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만일 이와 같은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었다면, 이보다 더 큰 일이 없는 것이므로 숨겼을 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와 같은 말이 있으니, 그 근원이 그때의 석공들 입에서 나왔다면,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 하략(下略) 

장경왕후 능이 꼭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말이 있으니 한번 알아 보기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도다. 장경왕후 산역 때 총책임자가 정광필(1462-1538. 영의정 역임) 이니 능이 잘 못 되었다면 최종적으로 그가 책임지게 된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중종 32년( 1537) 4월 25일 실록에 ‘희릉을 옮기도록 하다’ 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 끝에 다음과 같이 사신왈(史臣曰)이 붙어 있다. 

사신은 논한다. 김안로가 정광필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날마다 허항을 영의정 한효원의 집에 보내어 의논하였으나, 한효원이 듣지 않으므로 죽이지 못했었다. 그 뒤로도 계획을 날마다 깊이 하였으나 오랫동안 허물을 잡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정광필이 일찍이 총호사(摠護使)였으므로 이 사건을 중시하여 그의 죄로 만들려고, 마땅히 옮겨야 한다고 주창하여 의논하였는데, 사람들이 의견을 달리하지 못했다. 

어쨌던 이리하여 헌릉 옆에 있던 장경왕후 능을 서삼릉 지역으로 옮긴다. 천장한지 얼마 뒤 김안로는 문정왕후 마저 폐위시킬 모의를 꾸미다가 드센 문정왕후의 반격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죽는다. 김안로가 성공했다면 명종 때 문정왕후의 실정(失政)은 피했겠지만 김안로도 만만한 인물이 아니니 그가 저질렀을 악행(惡行)이 덜 했을 것 같지는 않다.

7년 뒤 1544년 11월 15일

중종대왕이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昇遐)한다.

이 장면 실록기사에 사신왈(史臣曰)이 4개 붙어 있는데 그 중 하나 옮긴다.

유시(酉時). 상이 환경전(歡慶殿) 소침(小寢)에서 훙(薨)하였다. 사신은 논한다상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조선 시대 사신(史臣)들도 참 대단하여 섬기는 임금을 이런 식으로 평하고 있다. 실록이 세계의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희릉(禧陵)에 합장

승하한지 다섯 달 째 되는 1545년 인종 1년( 1545) 2월 3일 중종의 유교대로 장경왕후의 희릉에 합장한다. 전 해 11월에 돌아가 2월 발인하는데 다섯 달이라 함은 윤달이 있기 때문으로 그 해 윤 1월이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임금을 다섯 달 만에 장사 지낸 것은 천자는 7개월, 제후는 5개월, 경대부는 3개월, (*)사서인은 달을 넘겨 장사한다는 중화적 예법에 의한 것이다. (*)말이 사서인(士庶人)이지 아무나 달을 넘길 정도로 오래 끌 수 없으니

일반 평민들이야 적당히 며칠 지난 뒤 땅에 묻었을 것이다.

합장하며 능호를 희릉(禧陵)에서 정릉(靖陵)으로 바꾸다.

장경왕후 옆에 동원이강(同原異岡陵 ; 같은 지역에 언덕을 달리하는 합장법. 필자의 먼저 글 ‘선릉’ 참조)으로 꾸미고 능호(陵號)를 어찌할까 의론이 분분하다가 정릉(靖陵)으로 바꾼다.

대간이 아뢰기를, 희릉(禧陵)은 장경왕후(章敬王后)의 구호(舊號)를 그대로 쓰는 것이니 존비(尊卑)와 경중(輕重)의 뜻에 어긋납니다. 구례(舊例)가 있다고는 하나 옛사람이 ‘낮은 것을 높은 데에 원용(援用)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만고의 떳떳한 도리이니 억견(臆見)으로 경솔히 바꿀 수 없습니다. 살았을 때에 섬기는 것이나 장제(葬祭)는 다 예(禮)를 따라야 마땅한 것으로 예에 어긋난다면 효도라 할 수 없는데, 어찌 구례를 따르고 상례(常例)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능과 전의 호를 고치소서.

정릉(靖陵)을 삼성동으로 천장(遷葬)하다.

이렇게 중종대왕과 제1계비 장경왕후가 서삼릉 지역 능침에 단란하게 누운 지 15년 만에 갑자기 중종대왕 능침을 옮기자는 논의가 나온다. 

명종 14년( 1559 기미 ) 4월 23일 갑자

전교하기를, 분묘를 구함에는 일반 백성들도 그 땅을 신중히 가려서 장사 지내고 만일 불길함이 있으면 곧바로 장지를 옮기는데, 더구나 나라의 왕릉이겠는가. 정릉(靖陵)은 처음부터 불길하다는 의논이 분분하였으므로 자성(慈聖-문정왕후)께서 미안하게 생각하여 곧 다시 천릉(遷陵)을 심의(審議)하려 하였으나, 당시 심의하여 정할 때에 결점이 없는 자리라는 말이 있었고 또 국사의 어려웠던 일이 겨우 안정되었기에 감히 천릉의 일을 가벼이 발설하지 못하였다. 중략 (中略)… 보니 불길하다는 말이 과연 옳았다. 근래에 일이 많았기 때문에 우선 잠자코 있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옮기지 않을 수가 없다. 후략(後略) 

표면상 이유는 서삼릉-희릉(당시 정릉)이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것이나 실은 문정왕후가 남편이 먼저 부인 곁에 합장된 꼴을 못 본 때문으로 위 기사에 사신왈(史臣曰)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다.  

사신은 논한다. 풍수설은 허망하고 근거가 없으니…(중략) ….더구나 자전(곧 문정왕후)은 중종이 장경왕후(章敬王后)와 같은 원침(園寢)에 있는 것을 꺼리어 급히 옮기도록 하고, 죽은 후에 같은 무덤에 묻힐 계획을 한 것이다. 요승(妖僧) 보우(普雨)는 밖에서 인도하고, 적신(賊臣) 윤원형(尹元衡)은 안에서 도와 15년 동안 편안히 모신 선왕의 능을 가벼이 옮기려 한다.(후략) 

사신(史臣)이 뭐라고 하던 중종은 서삼릉에 묻힌 지 17년 만인 명종 17년 1562년에 오늘 날 삼성동 정릉(靖陵) 자리로 천장(遷葬)되고, 중종이 합장됨으로 정릉으로 바꾸었던 장경왕후 능 이름은 도로 희릉(禧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태릉(泰陵)에

문정왕후는 삼취(三娶)로서 남편 중종(中宗)이 재취(再娶)와 같이 있는 것을 질투하여 남편을 삼성동으로 옮기고 자신도 뒷날 같이 묻힐 생각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문정 왕후가 정릉(靖陵)을 옮긴 것은 실로 자신이 죽은 뒤에 같은 묘역(墓域)에 묻히려는 계책을 한 것이었는데……

그런데 정작 문정왕후 능(陵)은 태릉(泰陵)이다. 이유는 현 중종 정릉 지역에 물이 많아 능을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정왕후는 태릉에 능침(陵寢)을 쓰고 중종도 천장하려 했으나 차마 두 번 옮길 수는 없기에 현재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결국 부인 셋과 다 떨어져 해마다 물난리를 겪고 임진왜란 때는 파헤쳐 지기 까지 한다.

이상 중종대왕 가족의 능침과 천장(遷葬)을 대동여지도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온릉에는     초취(初娶, 첫번째 부인) 단경왕후

서삼릉에는 재취(再娶, 두번째 부인) 장경왕후와 그 소생 인종대왕과 며느리 인성왕후 박씨

태릉에는     삼취(三娶, 세번째 부인) 문정왕후와 그 소생 명종대왕과 며느리 인순왕후 심씨

이렇게 있는데 중종은 그 누구와도 같이 있지 못하고 홀로 있다.

정릉(靖陵) 전경

정릉의 홍살문.

홍살문 너머 정자각(丁字閣)까지 참도(參道)가 벋어 있다. 다른 능과 같이 참도에 높낮이가 있어 신도(神道), 어도(御道)가 구별된다. 정자각 뒤로 급경사 잔디밭-사초지가 있고 그 위로 능침(陵寢)이 보인다.

비각(碑閣)

정자각 오른 편 뒤에 비각이 있고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조선국 중종대왕 정릉 朝鮮國 中宗大王 靖陵

대왕의 묘호(廟號)는 중종(中宗), 중국에서 받은 시호는 공희(恭僖), 우리나라에서 지어 올린 존호는 휘문소무흠인성효(徽文昭武欽仁誠孝)다.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으로 정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폐조(廢朝-연산군) 의 혼란하던 때를 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롭게 되었을 적에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중흥하여 종사를 다시 편안하게 하였으므로 중종으로 하였으며 

위태로운 왕조를 중흥(中興)했기 때문에 중종이라 정한다는 이야기인데 중종(中宗) 보다는 중조(中祖)가 좋지 않겠느냐는 인종대왕의 바람도 있었다.

전교하기를, 대행 대왕의 묘호를 보고 내 생각에도, 상사(商史)에 은(殷)나라의 도를 부흥시켰으므로 중종(中宗)이라 호칭하였다는 말이 있다 하여 조정이 이에 의거하여 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미 계하(啓下)하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하건대 부왕(父王)께서 폐조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反正)하고 종사를 40년 동안 편안하게 하셨으니, 중흥시킨 공이 작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조(祖)라 칭하고자 하는데 첨의(僉意)가 어떠한가? 중(中)자가 중흥의 뜻이라고는 하나 또한 흡족하지 못한 듯하니, 세조(世祖)의 예(例)에 견주어 종(宗)자를 고치고자 한다.”

공이 있으면 조(祖), 덕이 있으면 종(宗)으로 묘호를 정한다고 하나 왕위계승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 조(祖)를 쓰면서 비정상이기 때문에 그런다고 차마 할 수 없으니 그 명분이 조공종덕(祖功宗德)론이었다. 어쨌던 중종대왕은 종(宗)으로 하기로 결론 난다. 

신들이 상의 분부를 다시 받고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았습니다만, 세조를 조로 칭한 것은 아우로서 형을 이었기 때문인데 대행 대왕께서는 중흥하였어도 바로 성종(成宗)의 계통을 이었으니 조로 칭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능침(陵寢)

중앙에 능상(陵上), 그 앞에 혼령이 앉아 쉬는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 능상 주위 삼면을 곡장(曲薔)이 에워싸고 능상과 곡장사이에 석호와 석양  2쌍 계 4쌍 여덟 마리가 바깥을 바라보며 능상을 호위하고 있다. 곡장이 터진 쪽에 수구막이로 망주석이 좌우 한 쌍 세워져 있다.

병풍석

세조대왕의 명령으로 없어졌던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 다시 나타나 중종의 정릉 능침에도 둘러져 있다.

망주석(望柱石) 세호(細虎)

망주석 끝 부분에 귀 같이 달린 세호(細虎)에 무언가 조각을 했으나 모양이 아직 분명치 않다.

혼유석(魂遊石) 귀면(鬼面)

혼령이 나와서 앉아 쉬는 혼유석 다리-고석(鼓石)에 귀면이 새겨져 있다.

문무인석(文武人石)

장명등 앞 좌우에 문무인석(文武人石)이 한 쌍씩 서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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