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호치민 일대기(2)-유신회

멍탐정고난 2023. 8. 14.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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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회 (維新會)

 

20세기 초 월남에 ‘호이주이떤 이란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한자로는 유신회(維新會)로 쓴다. 주로 왕족 중심의 독립운동단체로 그 투쟁의 원동력을 월남 내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국원조에서 구했다.

외국이라고 해도 동남아에 진출한 당시 서구 열강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정도 인 바 이들은 각자 세력범위에 대한 일종의 담합. 즉 상대방 구역은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현상을 타파하고 싶은 것은 신흥세력이니, 월남 유신회에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 주는 나라는 후발제국주의자 일본이었다.

일본은 일찍부터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는 나중에 * 팔굉일우 (대아시아주의)로 수렴된다.

팔굉일우 (八紘一宇) ; 온 천하가 한 집안 이란 뜻. 그 집안 중심에 일본이 앉아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중에 허망하게 끝났지만 당시 20세기 초만 해도러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백인종에 맞설 유일한 황인종 국가라는 환상을 다른 아시아 나라들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유신회(維新會)는 일본의 도움을 청했고, 일본은 립서비스 상으로야 이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지만, 문제는 그때손을 뻗칠 실력이 일본에 없었다.

월남의 역사를 읽다가 우리와 닮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이런 점들로 유신회(維新會)-호이주이떤 은 김옥균 일파의 개화당(開化黨)이나,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외교론자를 닮았다.

아마 어느 나라 독립운동도 고상하게 외교로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환상에 젖는 단계가 있지 않나 한다.

우리나라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1923년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에서 그때까지의 노선(路線)을 자치론, 외교론, 준비론의 셋으로 분류한 뒤 하나하나 준엄하게 비판하고 대일투쟁의 유일한 길은 민중직접혁명의 길 밖에 없다고 한 바 있다.

이제 단재(丹齋) 선생의 외교론 비판 중 일부를 읽어 본다. 

“..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 하는 이들은 일검일탄 (一劍一彈)으로 혼용 탐포한 관리나 국적에게 던지지 못하고 공함(公函)이나 열국공관에 던지며, 장서(長書)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의 고약(孤弱)을 애소하여 국가존망 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조선혁명선언 중)

그런데 이 유신회는 일본과 월남 젊은이들을 보내 공부시키는 정도는 합의했던 모양이다. 때에 유신회의 지도자가 응엔신삭 과 친구라서 신삭의 아들 응엔떳타인(阮必勝)- 즉 호치민 도 일본유학 보내 준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한다. 이에 대해 호치민의 어릴 적 친구 이야기를 들어본다.

왕당파 운동에 불을 댕길 세력 있는 관료에게 의지하고 봉기의 주창자로 왕족을 내세우며 일본의 원조에 대부분을 의지하는 정책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찰스 펜의 ‘호치민 평전’ 에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어느 구절대로 능하다고 하는 사람의 생각은 대략 비슷한 모양이다.

선원(船員) 이 되다

프랑스 식 중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중학교 선생을 하다가 그만두고기술학교에도 몇 달 다니던 호치민은 1911년 -21세 되던 해 사이공 (현 호치민 시() 항구에 들어온 배에 선원이라기보다는잡부(雜夫)  감자껍질도 벗기고, 청소하고, 뛰어다니면서 심부름도 하는 노동자로 승선한다. 이때 바(Ba)라는 가명을 썼다니 아마도 그때 이미 프랑스 경찰의 감시대상에 올라 있지 않았나 한다. (호치민의 초기 이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이 바(Ba) 즉 우리의 호() 아저씨는  그 뒤 2년 동안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닌 듯 하니 아프리카에, 유럽의 도시들 그리고 뉴욕도 들렀다고 한다.

1913년 2년 동안 호치민은 선원생활을 끝내고 르아브르에서 하선한 뒤 정원사 일도 하다가 런던에 건너가 칼튼 호텔에서 조리사 보조로 일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칼 마르크스가 그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고 그 무덤도 있는 곳이나 호치민이 이때 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이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젊은시절의 호치민

1차 세계대전 (世界大戰)

1914년 1차 대전이 벌어지자 영국과 프랑스는 젊은이들이 전부 전쟁에 나간 때문에 후방에 인력난을 겪고 또 전쟁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막대한 사상자를 보충할 병력이 모자라게 된다. 이에 식민지에서 사람을 데리고 올 생각을 한다.

따라서 월남 사람들 수 만 명이 프랑스 노동판에 들어오고또 프랑스 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된다. 호치민은 이렇게 온 월남 노동자들의 통역을 하기 위해 영국에서 다시 프랑스로 건너왔다.프랑스가 월남인을 데리고 온 것은 표면적으로는 지원병 형태였다.

그러나 프랑스 본국에서는 그리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월남 현지의 식민당국은 인원할당을 채우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 쓰라는 지시를 하게 되고 이 사실상의 징병을 피하려면 돈과 빽이 있어야 했다. 이렇게 징병된 이들의 가족에게는 보상으로 아편 판매권을 주었다고 한다.

“ 그리하여 식민정부는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이중 범죄를 저질렀다. 해로운 아편을 장려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아편을 형제들의 희생과 결부시켜 이 더러운 보상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충분한 대가라고 생각게 함으로써 생명의 값어치를 떨어뜨린 것이다(전기(前記) 호치민 평전 에서)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 하는 일이란 비슷하기 마련인가 보다. 군대위안부 끌고 가면서 정신대(挺身隊)란 꽤 그럴듯한 이름 붙이고 업자(포주)들과 여자부모 간의 사적 계약 문제지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증거는 없다는 주장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식민지 백성을 끌고 온 종주국들은 결국 두 가지 면 하나는 신화(神話) 둘째는 사상면에서 대가를 치른다.

첫째 신화란 식민지 월남에서 프랑스인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수프 판매를 하던 학교에서 경비 일을 하던 일단 식민지에 들어오기만하면 프랑스 인은 왕자와 같은 생활을 한다. 모든 행정관은 대여섯 명의 사병을 양치기처럼 부리고 또 어떤 이들은 녹나무로 장식용 불상이나 우아한 함을 만드는 데 사병을 쓰기도 한다. 어떤 관리는 주방장 한 명, 지배인 세 명, 웨이터 세 명, 요리사 두 명, 정원사 세 명, 하인 한 명, 마부 한 명, 급사 한 명을 두었고, 그의 부인은 재단사 한 명, 세탁인 두 명, 침모 한 명, 바구니 만드는 사람 한 명을 두었다. 아이에게는 항상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특별한 하인이 있었다. 식사 중에는 각 손님 뒤에 사병이 한 명씩 배치되어 시중을 드는 데 그들은 모두 한 하사관의 통제를 받는다.’ (전기(前記) 호치민 평전에서)

이 부분에서 전에 어느 잡지 대담(對談)에서 일본인이 하는 이야기가 떠 오른다. 그 사람 요점은 자기네 일본의 통치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하면 본토와 식민지 간에 큰 차이 없이 비교적 평등했다는 것으로 일본인 관리 봉급이 조선인 관리에 비하여 2-3배 정도였는데프랑스의 경우는 월남인 관리에 비하여 30 배인가 50배인가를 주었다나. (옛날에 읽은 것이라 숫자는 정확하지 않음)

자기네 강도질이 그래도 양심적이었다는 말이지만 일본과 조선의 경제력이나 생활수준차이에서 생각할 면도 있는 것 같다. 현재 동남아 나 저개발국가에 나가 있는 한국회사의 경우 현지인에 비하여 3-40 배는 보통이고, 100 배가 넘는 경우도 흔하다. 가정부 3-4 명 두는 한국인 가정도 많다. 합방되었을 때 일본과 조선의 생활수준 차이는 어느 정도였을까?잘해 보아야 몇 배 정도 아니었을까?

또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외관상 생긴 것은 똑같은 데 월남 사람은 프랑스 백인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생겼으니 당시 흰둥이들이 노란 사람을 인간으로 안 봤다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정말 마음속으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본론으로 다시 되돌아가, 이렇게 신과 같던 프랑스인이 막상 본토에 와 보니 못 사는 사람 있고 그들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같은 일을 하면 물론 월남인이 조금 덜 받기는 하지만 월남처럼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 어느 부대가 항명을 했을 때 헌병대가 진압을 하는 데 헌병대 소속 월남인들에게도 프랑스 병사를 사살하라는 정식 명령이 떨어지니, 식민지 백성이 신과 같은 프랑스 인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꼴이 되었다.

프랑스에 건너온 수많은 월남인에게 이처럼 신화는 깨져 버렸고 이것은 곧 고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전파될 터이니 더 이상 신()이 아닌 프랑스는 식민지 통치에 큰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둘째 사상면은 사회주의

당시 염전(厭戰) 사상과 러시아 붉은 혁명의 성공으로 유럽에 공산주의가 기세를 떨치는 데 식민지 출신들에게 이 사상은 복음(福音)과 같이 들렸다. 당연히 좌익사상이 파고들고 호() 아저씨는 여기서 큰 몫을 하며 월남 동포들을 가르친다. 프랑스가 항불운동을 위한 학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진 : 호치민 1920년 (호치민 기념관) 밑에 설명에 alias (가명) Nguyen Ai Quoc 으로 써 있는 바로 이 이름 응엔 아이꾸억 (阮愛國)으로 발표한 논문이 월남인들의 심금을 얼마나 울렸는지?이 이름 아이꾸억은 바로 베트남의 전설이자 신화가 되어 버린다.

1차 대전 당시 영불은 그들 식민지뿐 아니라 중국 노동자 (쿨리(苦力)도 데리고 온다. 나중 중국 공산당의 원로가 되는 인물들 즉 등소평 등이 이때 근검공학(勤儉攻學)의 명목으로 프랑스로 온다.

근검공학이니 말은 유학이지만 낮에 쿨리 같이 노동하고 밤에는 사회주의 훈련 과정이었다. 이때 지도자 겸 강사가 명문집안 출신으로 정말 유학 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는 주은래 였다. 모택동 전기에 보면 ‘마오’ 는 이때 가지는 않고 대신 근검공학(勤儉攻學) 떠나는 동지들을 배웅하러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호치민이 이때 이런 중국인들-주은래, 등소평 등과 교류했는지 모르겠으나 나중을 보면 빨치산 투쟁의 교리나 여러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고 또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공산당 활동에 직접 뛰어들기도 한다.

이제 2부를 마치며 월남과 우리가 같고도 다른 점을 살펴본다.

두 나라 다 식민지가 된 경험이 있지만 그 종주국에 대한 감정이 다르다. 조선인이 더럽고 게으르고 단결을 못하고 나약하고 남 잘 되는 꼴 못 보니 민족개조를 해야 한다는 둥 식민사관에 영향받은 열등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본에 문화적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하기는커녕 일본이 근대 서양기술을 조금 일찍 받아들여서 그렇지 문화적으로야 뭐 볼 것 있느냐? 우리가 늘 가르쳐 주었지! 이런 생각으로 깔보기까지 했다.

호칭도 근년에는 공사석 구별 없이 일본, 일본 하지만 일제시대에 사석에서는 보통 ‘왜(倭)놈’ 이라고 비칭(卑稱)을 썼다.이 습관은 필자가 어렸을 때 까지 내려왔으니 어른들은 왜()놈, 왜정(倭政) 시대, 왜()놈들 뭐 볼 것 있나 이런 말 예사로 했다.

그러나 월남의 경우는 타력(他力)으로 해방된 우리와 달리 오랫동안 무수한 피를 흘려가며 빨치산 투쟁하여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기어코 프랑스 군을 섬멸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프랑스 문화를 진정으로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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