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임진왜란 1회전 , 탄금대 전투 (1) - 전투 사전 준비

멍탐정고난 2024. 6. 2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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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4 13일 쓰시마를 출발한 일본군은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후 파죽지세로 북상한다.

 

부산진-동래 전투는 조선의 예상 밖의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 일본군에게 지속적으로 격파당하였다. 거침없이 북상하는 일본군은 4 28일 충주에서 신립의 병력과 조우한다. 임진왜란 초기 최대의 전투이자 조선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긴 것이 바로 탄금대 전투이다.

일단 조선군과 조선 조정은 바보는 아니었고, 엄청나게 무능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초기의 지속적인 패전은 초기 대전략의 거대한 실패에 기인한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제일 큰 원인은 바로 일본군 병력과 일본의 국력 판단에 커다란 오차가 있었던 탓이다.

임진왜란기 조선과 일본의 국력비교

일단 일본의 전체 동원가능한 병력 총 47만으로 추산되는데, 조선은 이 숫자를 알지 못했다. 조선 자체의 장부상 동원가능한 군대가 14만이었으므로, 항상 왜국을 낮춰보던 조선으로서는 자신과 비슷한 규모를 예측했고, 바다를 건너 공격해와야하는 일본군의 입장에서 전체전력의 절반 (정유재란까지 하면 30만을 동원했으니, 전력의 60%이상을 투입한 공격이었다.)을 투입하는 공격을 전혀 예상 밖이었다. 사실 일반적인 국가에서 전체 병력의 50%이상을 침략에 동원한다는 것은 문치주의의 조선에서는 고려할 수 없는 상식밖의 일이었다. 그 병력을 어떻게 유지하며, 보급한다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투입 병력인 30만 중 60%이상을 손실했다.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은 몰락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상식으로는 미친짓을 벌인 것이다.

 

이시기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18,700명 가토 기요마사의 2번대는 22,800, 구로다 나가마사의 3번대는 11,000명인 반면 수비한 조선군은 이들과 맞선 각 군이 모두 1,000명을 넘지 못했다. 애초에 전투경험, 무기, 사기도 부족한데 절대적으로 병력도 부족한 것 이다.

조선의 지방 방어의 대전략이었던 제승방략은 기본적으로 침략을 받은 각 지방이 시간을 끌면 중앙에서 원군을 모아 반격하는 체제였다.

하지만 첫째, 절대적인 전력차이로 1일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 결과 병력을 집중시킬 시간이 없었고, 설사 지방의 중심지에서 전력을 모으더라도 일본군의 전력을 압도할 수 없었다.

실제 순변사 이일은 대구에 도착했지만, 이미 늦은 시기였기에 병력은 뿔뿔이 흩어졌고, 상주로 퇴각하여 고작 800여명의 병력을 모아 훈련을 실시했을 뿐이다. 이때 고니시의 1번대가 공격하였고, 전투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상주의 패배로 인해 선조는 마지막 카드인 신립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신립이 이끈 병력은 한양과 경기도에서 모을 수 있었던 모든 기병 8,000명이다. 신립은 충주에 도착하자 제승방략에 의거에 충청도에서 모인 12,000명의 보병을 인수한다.

그리고 후일 많은 이가 비판한 판단을 내린다. 바로 조령의 험준함을 지키지 않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회전이 펼쳐진 탄금대 앞의 달천평원

신립 입장의 변명을 해보자면,

 

1.    충청도의 보병 12,000명은 신립 입장에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병력이었을 것이다. 조령의 산속에서 방어를 하려면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 주력이 될 수 밖에 없는데, 12,000명의 지방군은 어제까지 농사 짓던 농사꾼들이고, 전투경험이라고는 1도 없는 군인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주로 북방에서 여진족들과 기병전을 벌이던 신립 입장에서는 이들을 믿고 수성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로 판단될 수 있었다.

 

2.    이미 늦었다. 신립이 4 26일 충주에 도착한다. 전투는 428일에 벌어지므로 조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바로 이동하여 하루만에 조령에 도착하여 방어 태세를 갖춰야한다. 충주성에서 조령1관문 까지 네이버지도 기준으로 현대의 길을 사용해서 도보 13시간이 걸린다. 하루를 꼬박 행군해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길이 현재보다 훨씬 안좋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1일 만에 도착하기 자체가 불가능 할 수 있다. 또한 도착하기만 하면 무엇하는가, 조령 관문에서 방어 준비를 할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조령에 도착해서 방어하는 것은 이미 시기를 놓친 상태였다.

 

 

그렇지만 조령을 포기하더라도 충주성에서 방어를 하거나, 다른 요충지에서 방어를 할 수 있지 않았을 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첫째, 충주성에서 방어할 경우, 동래성과 부산진성의 전투결과로 일본군의 공성능력은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은 1일을 채 못버티고 함락되었다. 충주성이 앞의 두성에 비해 지형이나 방어 수준이 월등히 높다고 판단되지 않기 때문에 수성전략은 불가하다.

 

두번째, 탄금대 앞쪽의 조령에서 내려오는 길목인 단월역 인근에서 방어를 하는 경우는 더 불리하다. 일단 성곽도 없고, 완만한 산지지역인 이 곳에서 병력과 무기가 열세인 보병으로 방어하기는 불리하다. 또한 이 곳을 우회하는 길도 존재하기 때문에 배후로 우회하는 적에게 포위되기 쉽다.

 

세번째, 한양으로 후퇴해 도성에서 방어하는 전략은 고려할 수 없다. 일단 싸우지 않고 후퇴한다면 왕에게 신립 본인은 살아남을 수 없다. 또한 한양이 충주보다 전술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점이 없다. 한양에서 방어한다면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는 방법 뿐이다. 한양의 도성 성곽은 지나치게 길고 이 것을 제대로 방어하자면 병력이 10만은 필요하다. 애초에 조선에서도 도성 성곽을 활용한 방어전략을 존재하지 않는다. 남한산성에 갇힐 경우 궁은 파괴되고 결국 인조의 최후만이 기다릴 뿐이다.

 

네번째, 일본군의 경로상 이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결국 강을 건너야한다. 대규모 병력이 결코 작지 않은 남한강을 건너려면 도강의 포인트는 결국 탄금대일 수 밖에 없고, 조선군은 결국 이것을 저지하는 것이 최후의 목표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신립의 선택은 탄금대 앞에서 회전을 벌일 수 밖에 없다. 어떻게든 고니시의 군대에게 승리하여 명의 원군과 조선의 병력보충에 필요한 시간을 버는 것이 필요하다.

 

- 2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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