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병자호란 날짜별요약

멍탐정고난 2023. 8. 9.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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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의 굴욕, 절하기 직전의 인조 (영화 "남한산성" 중)

 

1636(丙子년)  호란 전 청나라가 보낸 국서(國書)

11.25 까지 왕자와 대신을 보내라

“네 나라히 동지 달 이십 오일 젼으로 대신(大臣) 왕자(王子)를 보내 아니하면 내 당당이 동으로 크게 나가리라. 나 드르니 네 나라히 산셩(山城)을 만히 ?거니와  당당이 대노(大路)로 조차(=따라) 갈 거시니 산셩으로 날을 막을소냐 네 나라히 강화(江華) 밋거니와 팔도(八道) 즛바랄?(=짓밟을 적) 조고만 셤으로 님군 노릇을 할소냐. 네 나라히 의논 잡으니 다 션비니 가히 붓살 둘너(=붓을 쌓아서) 날을 막을소냐” (산성일기)

12.02 청군 심양을 떠남

청병이 스스로 20만이라 칭하였으나 실은 자기들 군사가 7만이고, 몽고 군사가 3만이며,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의 군사가 2만이니, 합하여 12만이었다

12.06 의주 용골산에서 봉화 2자루를 올리나 정방산성 (황주-도원수 본영)에서 끊김

12.09 청군 압록강을 건넘

자점이 말하기를, “망녕된 말로 군정(軍情)을 어지럽힌다.” 하고, 목을 베려고 하자, 신용이 말하기를, “적이 내일에는 마땅히 여기에 당도할 터이니 우선 나를 죽이지 마시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나중에 보냈던 군관이 또 와서 급함을 보고하는데 신용이 말한 바와 같으니, 비로소 장계를 올렸다. 대개 적병은 강을 건너서 성진(城鎭)을 돌아보지도않고 곧장 올라오면서 화친을 맺으려 한다고 칭하며, 바람같이 달려와, 변방을 지키던 신하들이 올리는 장계를 적이 모두 탈취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변방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연려실기술-병자록)

12. 10 일 적 안주 도착

12.12 임경업의 급보(장계)가 전해지고 오후에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 도착함

12.13 적이 송도를 지난다는 개성유수의 장계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 부산 영도 상륙, 한양 조정이 안 것 4월 17일 4월 25일 상주, 4월 26일 문경,  도성 5월 3일- 부산에서 20일 걸림

12.14 신주, 빈궁, 대군을 강화로 보냄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播遷)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예방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을 받들고 먼저 강도(江都)로 향하게 하였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의 행차를 배행(陪行)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12. 14  대가가 창경궁( 김훈 소설에 창덕궁으로 나오나 창경궁이 맞음)을 나와 숭례문을 막 나서는데 적이 양철평, 홍제원에 이르고 양천강을 막아 강화길을 끊었다는 탐졸의 보고를 받음. 옛날 강화별로(江華別路) : 한성-양화도-철곶천-양천-악포교-김포-백석현-통진-갑곶진-강화부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실록)

대가(大駕)가 창황히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 오후에 남대문을 나가 장차 강화도로 향하려는데 탐졸(探卒)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적이 이미 연서역(延曙驛)을 통과하였으며, 오랑캐 장수 마부대(馬夫大)가 수백 철기(鐵騎)를 거느리고 이미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한 부대로써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하고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었다.” 하니, 임금이 도로 성 안으로 들어와 남대문 문루에 앉으니, 상하가 황황하고 도성 남녀들의 우는 소리가 길에 가득찼다.  (연려실기술-병자록)

숭례문-구리개-광희문-살곶이 다리-신천, 송파 나루-남문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실록)

‘… 동궁이 손수 채찍을 잡고 채찍질하며 구리개[銅峴] 길을 경유하여 수구문을 나가자, 성중의 남녀들이 맨발로 달려 임금의 행차와 서로 뒤섞여 가는데 도로에 엎어지고 곡성은 하늘을 진동하였다……

유시(酉時)에 (오후 5-7시) 신천(新川)과 송파(松坡)의 두 나루를 건너니, 강물이 처음 얼었다. 산 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캄캄하고 이경에서야 (밤 9-11시 : 실록기사는 ‘초경이 지나서’) 비로소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임금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단지 5, 6명뿐이었다. (연려실기술)

12.15    경기(輕騎)로 과천과 금천의 들을 가로 질러 강화로 가려하다. 

14일 밤에 눈이 내렸다 (연려실기술 일월록)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성으로 되돌아 왔다.’ (실록)

새벽에 임금이 성에서 나오니 눈 온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임금이 탄 말이 미끄러져 임금이 말에서 내려 걸었는데, 여러 차례 엎어져 몸이 편안하지 못하여 도로 성으로 들어왔다. 중략(中略) 산성으로 돌아올 때 임금의 발이 동상에 걸려 걸을 수 없어 마침내 털방석으로 받들고 돌아와 남문에 도착하니, 가마가 비로소 왔다. (연려실기술)

12월 16일 적의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송책을 세워 안팎이 비로소 통하지 못하다.

적 진격로-삼전도(삼밭나루). 헌릉, 광나루

적은 이어 소나무를 베어 성 아래 80보에 울타리를 벌여놓고 새끼줄로 쇠방울을 달아매어 넘는 자가 있으면 딸랑하고 소리가 나도록 하여 성 안과 밖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송책(松柵)이라 한다.? (연려실기술)

12. 16 납서(蠟書)로 제도(諸道)의 군사를 부름

납서(蠟書)로 제도(諸道)의 군사를 부르고, 또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진군하여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다.” (실록) (*) 납서(蠟書) : 잔 글씨로 써서 밀()로 뭉쳐 몰래 전하는 글

12. 21 충청도 원병이 헌릉(獻陵)에 도착하여 화전(火箭)으로 서로 응하였다.(실록)

12. 25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다

12. 26 강원도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이 병사를 거느리고 검단산(儉丹山)에 도착하여 횃불로 상응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의 습격을 받고 패하였다. (실록)

12. 27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險川)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실록)

1637 (丁丑) 

1.     01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에 올라 동쪽으로 월봉(月峯)을 바라보고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실록)

1. 02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 쌍령(雙嶺) 도착

1.03 불당리 일대에 주둔하던 청군 6천이 이동하여 쌍령 전투 시작

좌병사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초관(哨官)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지탱하지 못하면 가운데가 홀로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완이 듣고 말하기를, “1등 포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므로 승전할 기세가 있었으나, 화약을 또한 단지 2냥씩만 주었기 때문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연려실기술)

 .. 그 결과 군사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공께서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용맹스럽게 허리춤에 활과 화살을 차고서 포위망을 뚫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 괴수를 쏘아 죽이고 호마(胡馬)를 빼앗아 타고 돌아왔다.”  (취수당)

경상감사 심영이 이끄는 본진 6천은 남한산성으로부터 100여 리 지점 여주 영릉 부근에 있다가 패전소식에 전의를 잃고 조령 방면으로 철수. 이외로 강원 감사 조정호, 함경 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시방 등이 군대를 이끌고 오지만 모두 왔다는 눈도장만 찍으려 한 것 같음.

1. 15  도원수 심기원이 장계를 보내, 구원병들이 대부분 패했다고 하다(실록)

홍이포

1. 19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 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실록) 

1. 25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南隔臺) 밖에  7,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준)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연려실기술)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1/25 실록) 

1.       22 강화도 함락

경징은 스스로 강화도를 금성 탕지(金城湯池)로 믿고 적이 날아서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태평스럽게 방종하여 날마다 술만 마셔 대며 주정을 일삼았다. (연려실기술)

이때 경징은 방비와 수비에는 마음이 없어 초관(哨官)들을 풀어주어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 한 섬 외에는 정탐도 하지 않으니, 식자(識者)들이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때 갑곶(甲串) 이하에서 연미정(燕尾亭) 이북까지의 사이에는 일찍이 몽둥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 하나 없었다.(연려실기술)

용골대는 일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진 문수산 위에 이르러 강화를 굽어보니 강화섬은 손바닥만 하고 갑곶에도 지키는 군사가 없었다. 그래서 민가를 헐어 그 재목으로 뗏목을 만들고 건너가 섬을 함락시켰다. (택리지)

적병이 나루터에 주둔하여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니 포환이 강을 넘어서 육지 몇 리 밖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파괴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경징과 민구는 겁에 질려서 정신을 잃고 창고 밑으로 피하니 온 군사가 요란하여 항렬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징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으로 돌아가서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겠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1.     26 강화도 함락 소식을 처음 듣다

강화도 함락 소식이 나흘 뒤 1월 26일 적장 용골대에 의하여 성중에 전해짐. 

이에 처음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성 안의 사람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실록)

사대부들 가운데 가족이 강화도에 있는 자가 10명에 8, 9명이었는데,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놀라며 흐느껴 우니 기상의 비참함이 말로 할 수 없었다 (연려실기술)

1.     26 군심의 동요

훈련 도감과 어영청의 장졸이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오랑캐에게 보낼 것을 청하다 (실록)

장수와 사졸들 신경진과 구굉의 진영의 장사들이 또 대궐 아래로 나아가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낼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대포에 맞아서 성첩이 모두 다 파괴되어 사세가 이미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문사들은 단지 고론(高論)만 일삼고 있으니, 문사들에게 망월대를 지키고 막도록 하소서.” 하니, 이때 장수와 군사가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사태는 모두가 명사(名士)들의 고론(高論)에 말미암은 것이니, 만일 이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가 될 수 없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만일 나라에 문사(文士)가 없으면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들은 매양 명사들을 볼 때마다 자연히 칼자루를 굳게 잡게 된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사나운 무인들이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으로 작정하고 화친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분을 터뜨린 것으로 신경진과 홍진도가 몰래 선동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소리에 응하여 일제히 일어난 것이 거의 (*)전조(前朝)의 화를 면하지 못할 뻔하였으니, 위태하고 위태하다. (연려실기술-잡기)

항복

삼궤고구두례 - 영화 "남한산성(2017)"

1636. 12. 16

마쟝(馬將)이 니로되 "동궁(東宮)이 아니 오면 화친을 못하리라" (산성일기)

그러나 임금-인조대왕이 직접 나와야 된다는 요구는 아직 없었으며,

12. 22 동궁은 아니라도 왕자를 보내 주면 화친하겠다고 수위를 다시 낮춘다.

마부대(馬夫大) 통사 보내여 니로되, "만일 황연이 깨다라 왕자(王子) 대신(大臣)을보내면 뎡하여 화친하쟈" 하되 샹이 오히려 허치 아니시다 산성일기) 

1637. 1. 26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세자가 나온다는 뜻을 알리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 (실록)

항복(降伏)의 절목 두 가지

읏듬 졀목은 밤함하는 구슬을 입의 믈고 ? 관을 싯고 나가미오(산성일기)

첫째 절목은 두 손을 묶고, 시체에게나 물려 주는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한다’ 는 뜻

()나라 삼세(三世)황제 자영(子?)이 유방에게 항복할 때 소복(素服) 흰 옷을 입고 노끈을 목에 걸고 (목숨을 바친다는 뜻) 옥새와 부절을 들고 (나라를 들어 바친다는 의미) 흰 말이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나갔다고 함.

백제가 항복할 때 의자왕이 술을 치고, 김법민(문무왕)이 부여융(의자왕의 아들) 에게 침을 뱉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읏듬 졀목은 참혹하니 둘재 졀목이 맛당하도다…. …둘재 졀목은 군신(君臣)과 하인 합하야 오백 인을 거느리고 위의(威儀)와 군병(軍兵)을 업시하고 그믐날 츌셩하라…. (산성일기)??

용골대가 말하기를, “삼전포(三田浦)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壇)을 쌓았는데, 황제가 서울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이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용포(龍袍)를 입고 계시는데, 당연히 이 복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용포는 착용할 수 없소.” (실록) (*홍서봉 : 당시 좌의정) 

구태여 청의(靑衣)는 닙으라 하는 일은 업스되 명길이 졔 짐작으로 니로되? "뇽포(龍袍)는 닙지 못할거시니 ?의를 닙으시미 맛당하니라" 하고 쥬샹과 세자 닙으실 ?의를 밤새도록 재촉하여 지이니라 (산성일기)

…말하기를, “남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오랑캐가 답하기를, “죄가 있는 자는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니, 서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옳다. (연려실기술 중 잡록)

1월 30일

삼십일의 일색(日色)이 무광(無光)하다. (산성일기) 30일에 안개가 짙고 햇볕이 없었다. (연려실기술) 샹이 세자로 더브러 ?의(靑衣)를 닙으시고 셔문으로 조차 나가실새 셩의 가득한 사람 통곡하여 보내오니 셩?의 곡셩이 하날 사못더라 (산성일기)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실록)

임금이 성을 나갈 때 온 성중 사람이 곡하면서 보내니, 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연려실기술)

절 받다가 홍타이지가 오줌 누는 장면-허구 절 받다가 개한테 고기를 던져주는 장면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실록)

이 부분 심상하게 넘기다가 소설을 읽고 ‘아 그런가’ 하고 다시 들쳐 보았음. 삼배구고두를 한 뒤, 이어지는 잔치도 끝나고 상 치울 무렵 일로 오랑캐 풍속에 대한 단순한 사실적 묘사로 본다.

1월 30일 저녁 도성으로 돌아옴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실록)

吾君 吾君, 捨我而去乎?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실록)

 (*)인정(人定)- 밤 10시경 종을 28번 치는 것.

 이상

 

청-명의 전쟁 요약

- 중간 1636.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잠깐 조선에 쳐들어와서 파란색이 된 것이 병자 호란이다. 당시 명나라 상황을 보면 북쪽으로 청나라가 위협하고, 내부에서 끊임 없이 민란이 터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도 이자성의 민란세력. 청은 명이 스스로 자멸하길 기다려 손쉽게 중국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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