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완주 송광사 여행기 - 2 - : 대웅전과 불화 감상기

멍탐정고난 2023. 11. 2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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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 - [여행기] - 완주 송광사 여행기 - 1 : 일주문에서 천왕문 까지

 

완주 송광사 여행기 - 1 : 일주문에서 천왕문 까지

요사이 완주는 이런저런 작고 핫한 스팟들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이 여행지로 많이 선택하고 있다. ​선비들이 풍류를 즐길 만큼 풍경이 아름다운 비비정부터, BTS도 다녀갔다는 힐링 성지인 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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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은 2편으로 가보자. 글이 길어져서 2편으로 나누기로 했다. 절이 그리 크진 않지만 쓰다 보니 내용이 너무 길어졌다. 아버지처럼 쓰기엔 아직 내공이 부족한가 싶다. 일단 나는 아버지처럼 문과도 아니고 사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기에 글에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거나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내가 논문이나 기사를 쓰는 것도 아니고 재미삼아 쓰는 것이니 관대하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천왕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그 끝에 대웅전이 있다. 마당 동편으로 극락전, 지장전이 있고, 마당 한가운데 (약간 서편에 있다.) 종루가 있다. 

대웅전과 종루 전경

 

송광사 종루는 중앙의 1칸에서 사방으로 1칸씩 돌출된 아(亞)자형 평면의 2층 누각 건물로, 십자형 평면 위에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세웠다. 일반적으로 종루나 종각이 사각형으로 지어지는데 반해 송광사 종루는 보궁(寶宮)에 주로 채택되는 십자형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십자형은 내부 공간구성이 어려울 뿐 아니라 지붕을 구성할 때도 회첨이 많이 생겨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광사 종루는 기단 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워 완전한 십자형 누각을 구성하였다. 누하주(樓下柱)는 굵은 나무를 민흘림을 주어 8각으로 치목하였고 그 위에 다시 원기둥을 세워 2층 누각을 지지하고 있다. 2층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처리되었으며, 기둥 위에 창방을 걸고 그 위에 평방을 서로 반턱맞춤으로 결구하여 공포를 배치하였다.

이 건물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공포대가 크고, 중첩되는 살미선과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선 그리고 계자난간 등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다.공포는 십자형태의 화려한 팔작지붕을 지지하기 위해 다포식으로 중첩되어 그 자체만으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대웅전의 공포와 비교해 볼 때 장식적 수법은 덜하지만 쇠서의 앙각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여 대웅전이 중건되던 시기에 같이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의 종루는 현재까지 그 연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건물의 연대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1814년 혹은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루에 걸린 범종·법고·목어·운판 등은 1977년에 조성된 것이고, 바닥에 놓인 범종은 1716년(숙종 42)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조성되어 1769년(영조 45)에 중수된 것이다.

송광사 종루는 독특한 평면과 화려한 공포, 날아갈 듯한 추녀선들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은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일한 십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종루를 지나보면 이 사찰의 메인건물이라 할 수 있는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큰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일컫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여래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송광사 대웅전에는 조선후기에 유행한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 즉 삼세불상(三世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송광사는 1622년 중창되었다. 원래 최초는 고려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탄생했다지만, 그때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중창당시 벽암 각성대사라는 분에 의해 전국에서 수천명이 모여 시주함으로써 인조대에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 벽암이라는 분은 당대의 최고 승려로서 병자호란 때 의승군을 소집하여 서울로 진군하고, 남한산성을 쌓을 때도 팔도도총섭으로서 승군들을 이끌고 성을 완성하였던 승병대장이었다. 그가 참여했다는 의미는 이 사찰의 중창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정책이었으며 왕실의 재정 후원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대웅전에 보면 삼세불상 옆에 '불상조성기'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글자판이 존재하는데 

송광사 개창비(開創碑)에 의하면 송광사는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점지(占地)되었고 1622년에 중창되었다. 당시 중창에는 덕림선사(德林禪師)를 중창주로 하여 응호, 승명, 운정, 득순 등이 참여하였다. 대웅전을 중창한 후 벽암(碧巖) 각성대사(覺性大師)를 초빙하여 50일간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 시주함으로써 1636년(인조 14)에 이르기까지 계속 큰 불사가 이루어져 송광사는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대공덕화주(大功德化主)인 벽암은 당대의 최고 승려로서 병자호란 때 의승군을 소집하여 서울로 진군하였고, 남한산성을 쌓을 때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서 승군들을 이끌고 성을 완성하였던 승병대장이었다. 그가 송광사의 중창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 사찰의 중창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을 새로이 공고히 하는데 유익하였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 배려와 재정적 후원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대웅전에는 관람 포인트가 3가지나 존재한다. 

1. 외부 사면을 둘러싼 불화

2. 대웅전의 크기에 비례해 너무나 거대한 불상

3.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2미터가 넘는 삼전패

 

 

대웅전 현판에는 '의창군서'라고 한켠에 이 현판을 쓴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이 의창군이라는 사람은 선조가 아꼈다는 인물로 선조에게 심하게 가스라이팅 당한 광해군과는 사이가 별로 안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의창군은 광해군이 폐모살제 할때에 (인목대비를 쫒아내고 영창군을 죽임) 반대하는 뜻으로 회의에 불참하여 광해군의 눈밖에 나고, 허균(의창군의 처 외삼촌이다. 의창군의 처는 허난설헌의 오빠이자 허균의 형인 허성의 딸이었다.) 의 역모사건 때에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경기도 모처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쫒겨나자 풀려나서 인조와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아무튼 의창군은 인조의 측근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이 사찰의 역사에 인조의 힘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둥을 높게 하여 문인방 상부와 창방 사이에는 사방을 돌아가며 벽화를 그렸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닌지라, 그림을 보고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대웅전 내부를 보면 정말 거대한  5미터가 넘는 불상 3기가 대웅전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마 원래는 2층 건물이던 대웅전에 모셨던 불상이었기에 사이즈가 이렇게 되었을 텐데, 후기에 대웅전을 단층으로 개축하면서 건물과 비례가 맞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렇게 건물에 비해 거대한 불상이 존재하는 풍경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부처에게 압도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사진상으로 보기보다 실제를 마주치면 정말 거대하다.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소조불은 점토를 이용하여 계속 붙여 나가면서 일정한 형태를 만든 다음 말리거나 불에 굽는 기법으로 테라 코타(terra cotta)라고도 한다. 흙을 사용하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들고 수정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내구성이 약해 부서지기가 쉬워 오래된 작품은 적은 편이다. 조선시대의 소조불은 삼국시대와 달리 형태가 크기 때문에 안에 목심을 받치고 그 위에 점토를 붙여서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삼베와 칠, 그리고 개금을 이용하여 표면 처리를 하였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명의 불상 사이사이엔 목조로 만든 명패가 있다. 각각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세자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라고 써있다. 

 

5미터에 달하는 불상앞에 놓여있어서 상대적으로 작아보이지만 이 목판 삼전패 역시 2미터에 닳라는 큰 크기이다. 아무래도 왕, 왕비, 세자의 후원으로 이 절이 지어졌음을 뜻하기에 크게 장식해놓지 않았을까? 완주의 송광사는  종남산에 있다지만, 사실 그렇게 산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넓직한 평지에 위치해 있다. 산 아래 평야에 넓게 위치한 이 절은 유학에 심취된 사대부들이 볼 때는 있어서는 안될 존재이기에 왕의 권위를 앞세워 사찰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반박시 당신이 옳을 것이다.

 

송광사에서는 템플스테이도 운영한다. 템플스테이의 프로그램은 새벽4시에 일어나서 스님들과 명상하는 자비없는 스케쥴이지만, 마음을 비우고 힐링하기에 이런 특별한 경험도 좋지 않을까? 나도 아직 도전해보지 못했다.

 

 

송광사 템플스테이 참가자들

 

대웅전 말고도 극락전, 나한전, 지장전도 있도 있고 대웅전 서편으로 엄청 큰 석불입상도 서있었다. 하지만, 이 블로그에서는 여기까지만 다루고 넘어가기로 했다. 혹시 방문하실 분은 다른 곳도 보시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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