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순천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벽화로 본 선종(禪宗)

멍탐정고난 2023. 7. 29.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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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어느 법당(정확히 어느 법당인지는 기억 못 함) 벽에 그림이 시리즈로 6점 있었다. 그림이 좋다기보다, 선종의 발생과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의 포인트를 잘 잡은 듯하여 사진을 찍어 왔는데, 이제 글을 몇 자 붙여 본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松光面) 조계산(曹溪山) 서쪽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며 대길상사(大吉祥寺) 또는 수선사(修禪社)라고도 하는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僧寶寺刹)로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며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선수행(禪修行)의 도량이자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출처] 순천 조계산 송광사.|작성자 cds9494'

송광사 일주문(一柱門) 현판은 조계산대승선종송광사(曹溪山大乘禪宗松廣寺) 다.


대승(大乘)과 선종(禪宗) 으로 송광사의 종파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대승(大乘)

승(乘)은 수레, 탈 것이니, 대승(大乘)이면 큰 수레다. 요즘 불경을 영어로 옮기며 the Great Vehicle로 번역하는 것을 본 적 있다. 고대 인도 어(語)로 마하야나(Mahayana)다. 지금 남쪽 관광객에게 개방하는지 잘 모르지만 금강산에 마하연(摩訶衍)이란 곳이 있다.

마하야나를 한역(漢譯)할 때 뜻을 따라(意譯) 대승(大乘), 발음을 따라(音譯) 마하연(摩訶衍)이라고 한 것이다. 수레를 크다고 하려면 작은 수레가 있어야 한다. 비교 대상이 없는데 큰지 작은지 어찌 알 것인가? 그 작은 수레가 소승(小乘)-히나야나(Hinayana)다.

큰 수레(大乘)가 나오기까지 BC 544년 (또는 BC 486년) 석가여래 입멸(入滅-돌아가신)후 한동안 불교 교단에는 글로 된 경전이 없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나는 들었노라고(여시아문-如是我聞) 여러 제자들이 모여 정리한 내용을
암송(暗誦)하며 전달했을 뿐이다. 어떤 언어로 정리했는지도 알 수

석가여래가 언제 탄생하고 입멸했는가 에는 설이 여러가지다. 인도인은 유한한 인간의 역사에는 별 관심 없었는지, 기록에 힘쓰지 않았다. 이런 점이 중국인들과 다르다. WFB(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에서 BC 544년을 부처님 입멸한 해로 결의한 바, 우리나라 불교도 이를 쫓았다. 이 경우 올해 서기 2010년은 불기 2554년이 된다. 불기(佛紀)는 부처님 탄생이 아니라, 입멸부터 따진 것이다. 암송도 여럿이 전문적으로 나누어하면 생각보다 많이 할 수 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 정도 분량을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을 테니, 지금 전하는 대장경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지 않은 부분도 들어있을 것이다. 여래(如來) 입멸 한지 200년 뒤, 아육왕(阿育王-Ashoka 왕) 때 비로소 말씀은 글로써 정리되기 시작했다.

개혁

현실 세계는 언제나 모순에 가득 차 있다. 대개 새로운 종교나 사상은 이 모순에 불만을 품고 나온다. 새로운 세력이 도전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성공한다. 성공하는 그 순간 기득권세력으로 바뀌며, 세월이 흐르며 모순이 쌓여간다.
그러면 새로운 세력이 이에 다시 도전하는 일이 계속 되풀이 된다.

영구혁명론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이런 것 때문에 나온 이론 아닐까? 인도에서 불교가 생겨난 것은 기존 브라만교의 폐단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몇 백 년이 흐르자 불교 자체에 모순이 쌓이고, 불만이 터져 나온다.
여래(如來) 입멸 후 수도자들의 주관심사는 자신들 개인구원이었다고 한다. BC 2세기 경 수도승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 많은 사람을 구하려면 잔잔한 수레-택시로는 어렵다. 보다 큰 탈 것-버스 같은 것으로 실어 날라야 할 것이다.
이에 개혁세력은 자기네를 큰 수레(大乘)라고 자부하며 부른다. 자기네가 큰 수레니, 상대-기존 교단은 작은 수레(小乘)가 될 수밖에 없다. 소승이 스스로 작은 수레라고 겸손하게 자칭(自稱) 한 것이 아니라, 대승 쪽에서 쟤넨 작은 수레-못쓰는 수레라고 얕잡아 부르던 이름이다.

오늘날 대승(大乘) 불교는 주로 중국, 한국, 일본에 퍼져 있고 소승(小乘) 불교는 남쪽-인도차이나, 태국, 버마, 스리랑카 등이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북방불교, 소승은 남방불교 또는 (수도자들 중심이라고) 장로불교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승(大乘)이니, 소승불교를 은근히 깔본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여래의 말씀-불설(佛說)은 소승불교로 전해졌다.

대승의 개혁은 비불설(非佛說)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여래의 참뜻-마음을 받들었다고 주장한다.
말씀은 아니지만 그 참마음을 받았다면 더 할 말이 없다. 설(說)과 참뜻(마음)은 가끔 다를 수 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알아냈으며, 알아냈다는 것을 과연 믿어도 될까는 또 다른 이야기다.

소승(小乘)은 나름대로 불교 출발 시의 소박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충실히 전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렇게 만만히 볼 교단이 아닌 것이다.

선종(禪宗)

이제 모든 사람이 다 탈 수 있는 수레-大乘이 나왔으니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할 터인데 세상 일이 또 그렇지가 않다. 서점 종교 코너를 가면 웬 교회 서적이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신약 27서(書)라지만, 예수님 말씀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 다 합쳐서, 중복된 부분을 구태여 빼지 않더라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말씀에 조금 더 붙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웬 논설이 그리 많을까? 그거 다 읽어야 구원받나? 그럼 어린이는 어떻게 구원받나? 예수님은 어린이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읽지 않아도 구원받는데 별 지장 없다면 왜 자꾸 책을 내는가? 이름난 목사라면 저서 한 권쯤 있어야 할 것 같아, 괜히 내는 일도 있을 것 같다. 목사도 아닌 도올까지 책을 써 놓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도올의 책은 (적어도 나에게는) 꽤 읽을만했다. 한 줄짜리 원문(原文)에 날이 갈수록 주석이 불어나
산더미같이 달리는 일은 어느 시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럼 이래서는 못 살겠으니 트리밍 해야겠다는 생각이 나오기 마련이다. 대강 이런 현상이 불교에도 일어난다.

해가 갈수록 경(經), 론(論) 소(疏)가 늘어만 간다. 하나하나 들으면 그럴듯하겠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과연 다 필요한가?
나는 이 글을 쓰며 불교 각 종파를 요약한 책을 보고 있다. 주장마다 간략하게 몇 줄씩 써 놔서, 읽어도 무슨 말인지 뜻을 모르겠다. 요약이라기보다 일종의 목록인데, 그 목록만 책으로 한 권이다. 그러니 그 목록의 각 항목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주장을 펼친 책을 (한 권씩 만일 리는 없다) 다 모으면 얼마나 될까? 책에 깔려 죽을 것이다.

이에 문자 다 필요 없고-불립문자(不立文字), 마음으로 직접 느껴라 -직지인심(直指人心) 여래(如來)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하였다-교외별전(敎外別傳) 본성을 깨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수도자들이 생겨났으니, 선종(禪宗)의 시작이다.

처음 사진-현판의 조계산대승선종송광사(曹溪山大乘禪宗松廣寺)는 조계산에 있는(장소), 수도자 개인보다는 일반 신자도 (大乘), 너절한 책 보다 마음을 통해 구원하는데 관심 있는 교단(禪宗)에 속한 절이란 뜻이다.

송광사 벽화로 본 선종(禪宗)

염화미소(拈花微笑)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 이야기 정도는 들어 보았을 것이다. 拈은 집을 ‘념’, 시중(示衆)은 대중에게 보인다는 뜻이다.

그림 가운데 앉은 분은 석가여래로 후광이 그려져 있다. (연) 꽃을 집어서 (拈花), 모인 여러 대중에게 들어 보이며(示衆)
비시시 쪼개고 계신다(微笑). 부처님을 둘러싼 대중들은 표정이 굳어 있는데, 오른쪽-역시 머리에 후광이 그려져 있는 노인만 생긋 웃고 있으니, 제자들 중 나이가 가장 많다는 가섭존자(迦葉尊者: Kasapa)다.

여래와 가섭이 서로 마음으로 통했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다른 말로 하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이 염화시중 (拈花示衆)의 미소야 말로, 선종(禪宗)에 딱 어울리지 않는가? 이렇게 좋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선종(禪宗)은 왜 여래 입멸 후 근(近) 1천 년이 지난 뒤에나 나왔을까?

나는 우연을 잘 믿지 않는다. 선종(禪宗) 주창자들에게는 어떤 근거가 필요했을 것이다. 동양, 아니 어느 문화에서나 새로운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원래 이런 것인데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 하고 가탁(假託), 의고(擬古)하는 쪽이 훨씬 편하고 쉬웠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는 초기 불설(佛說) 정리 때 들어있지 않다가, 직지인심(直指人心), 교외별전(敎外別傳) 주장이 나올 때 문득 나타나 버린 것은 아닐까?

단비구도(斷臂求道)

단비구도(斷臂求道)란 팔을 잘라 도를 구한다는 뜻이다. 파초(芭蕉)로 보면 남방(南方) 같은데, 색깔은 눈 덮인 장면이고,
인물도 어쩐지 추위에 떠는 듯하다. 아주 남쪽은 몰라도 양자강 일대는 추울 때가 있다. 상해의 겨울을 얕보고 갔다가 덜덜 떨고 온 사람 많다. 단 그림의 배경은 소림사 부근인데, 낙양 일대에서 파초가 자라는지는 잘 모르겠다. 동굴인지, 바위 밑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구도자 머리 주위에 후광(後光)이 둘러져 있는데 얼굴이 대단히 익다.

동양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달마(達磨-Dharma,?~536) 대사다. 달마 왼쪽 아래로 어느 스님이 칼을 들어 자기 팔뚝을 엉뚱 베어내고(斷臂), 잘린 팔목은 파초 잎 위에 놓여있다. 이 스님은 혜가(慧可) 대사다. 혜가는 달마가 소림사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갔다. 추운 겨울, 눈은 내리는데 애원해도 받아주지 않으며, 결심을 보이라 한다.
이에 혜가가 칼로 팔목을 잘라 보이자, 달마조사가 제자로 받아들인다는 장면이다.

달마(達磨)쯤 되는 분이 꼭 팔뚝을 잘라 내야만 굳은 결심을 알아챘을까? 불교신자라면, 팔뚝을 서슴없이 잘라내는 혜가(慧可) 대사의 결의에 감동 먹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불교의 교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 그림을 중국에 선종의 법을 전한 초조(初祖) 달마와 그로부터 법통을 이어받는 이조(二祖)인 혜가(慧可)를 기록한, 그러니까 중국 선종의 시작을 알리는 계통도(系統圖)로 이해했다.

육조점두(六祖點頭)

집 안에 디딜방아가 있고, 한 동자가 발을 딛으며 찧고 있는데 그의 등에는 돌멩이를 메고 있다. 비죽이 열린 문가에 하얀 노스님이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노스님은 중국 선종의 제5조(五祖) 홍인(弘忍) 대사, 방아를 찧는 행자는 제6조(六祖) 혜능(慧能) 대사다.

혜능은 체구가 작아 방아를 찧을 때면 돌을 메고 찧었다. 어느 날 글을 모르는 혜능이 다른 이의 도움을 얻어 벽에 "참 지혜는 애초 나무일리 없고, 마음의 거울 역시 틀이 아니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먼지는 어디에 끼랴"라는 게송을 붙인다. 이에 홍인이 혜능을 불러 금강경을 설한 후 발우와 가사를 내리고 법통을 잇게 한다는 장면이다.

초조 달마에서 5조(五祖) 홍인(弘忍)까지 한 갈래로 내려오던 중국 선종은 홍인의 세 제자로부터 세 갈래로 갈라진다. 6조(六祖) 혜능(慧能)은 홍인의 제자 중 하나로 중국 광둥 성 조계산 아래 보림사에서 남종선(南宗禪)을 시작한 분이다.

우리나라 선종의 뿌리는 중국의 남종선(南宗禪)이니, 초조(初祖) 달마(達磨)와 이조(二祖) 혜가(慧可) 벽화 다음에 5조(五祖) 홍인(弘忍)과 6조(六祖) 혜능(慧能)의 장면을 배치했으리라. 송광사 뒷산 조계산도 송광사의 뿌리 남종선이 시작한 중국 보림사 뒷산 조계산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번호 붙은 조사(祖師)

두 벽화- 초조(初祖) 달마(達磨)와 이조(二祖) 혜가(慧可), 5조(五祖) 홍인(弘忍)과 6조(六祖) 혜능(慧能)의 벽화에서  1,2,3,4 하고 번호를 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정태세문단세 하고 조선왕조 임금을 외우는 사람은 많지만 3대 태종, 4대 세종, 5대 문종하고 대수까지 붙이지는 않는다. 선종은 왜 번호까지 붙여 나갈까? 선종에게는 법이 누구에게 시작해서 어느 조사를 거쳐, (자기네로) 내려왔다는 것이 지독히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종(禪宗)의 문제점

견성성불(見性成佛), 직지인심(直指人心), 문자 필요 없노라고(不立文字) 한 것은 좋지만, 누가 깨쳤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미소가 과연 깨달은 미소인지? 썩소(썩은 미소)인지 어찌 구별하나? 선종이 나오기 전 교종(敎宗)에서는 공부한 양(量)이 있다. 공부는 어느 정도 측정이 가능하고, 글로 썼으니 내용을 토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깨달았노라고 외치면 다 인정하란 말인가?

별 방법이 없고 대신, 확실히 깨달았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분, 예를 들면 달마조사 같은 분이 인정하면 깨달았다고 칠 수 있지 않을까? 그 인정받은 스님이 다시 다음 대(代)를 인정하고…. 결국 선종은 스승이 제자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이것이 또 중국의 전통과 맞아떨어졌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종가(宗家)가 어디고, 어디서 파가 갈라지고, 하며 계통 따지는 거 무척 좋아하지 않는가? 구조도 그렇고 전통에도 맞았으니, 선종은 누가 누구에게 법등을 전하고 하는 것들이 중요하고, 또 그렇게 계통을 대야 인정받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 무슨 총림(叢林)이니, 어느 문중이니 하는 것들이 그리 대단한 것도, 선종의 원리 상 스승과 제자의 계통을 따라 법등(法燈)이 내려갈 수밖에 없는데 까닭이 있을 것이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지만, 무슨 게송(偈頌)이니, 공안(公案)이니,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들이 엄청 많다.

사진은 백양사에 있는 비(碑)인데 아래에 ‘이 뭣고’라고 쓰여 있다. 화두(話頭)인데, 선종(禪宗)에는 이런 화두가 1700 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 스님은 이 뭣고 가지고 깨달으셨는지 모르지만, 이 뭣고가 대체 뭔데 할 사람도 있을 텐데 돌에 새길 필요까지 있나?

성철 스님 살아 계실 때 어렵게 어렵게 취재에 성공한 기자에게 ‘남의 말을 함부로 믿지 말라’(정확한 지는 자신 없다) 딱 한 마디 하시던 걸 티브이에서 본 적 있다. 그 남의 말에는 성철스님 말도 들어가는 것 아닌지? 믿지 말라는 바로 그 말을 주야장차로 틀어대면 스님 뜻에 어긋나는 것 아닌지? 선종(禪宗)은 그 구조 상 교조주의(敎條主義)의 덫에 빠질 위험이 높다.

주변문화(周邊文化)

존심은 좀 상하겠지만, 우리는 중국의 주변 문화였다. 뭐 존심 상할 것도 없다. 전 세계 문화에서 중심이라고 할만한 것이 과연 몇이나 되나? 덩치도 작은 우리가 그 몇에 끼지 못했다고 쪽 팔릴 것은 없다. 이걸 인정 못하고 우리가 한자를 만들어 중국에 가르쳐 주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야 말로 창피한 일이다.

왜 기껏 만든 한자를 다 잊어버리고, 다시 배우고 그랬는데? 그것도 우리가 가르쳐 주었다는 사람들한테서. 대신 우리 조상(祖上)은 문화를 일단 받아들이면, 철저히 갈고닦아, (중심부 보다) 더 고급하게 완성하는데 선수였다. 불교는 인도에서 나왔지만, 중국에서 더욱 심화되고 세련되어 갔다.

그걸 총정리해 낸 것이 고려의 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고려 대장경을 한 질 얻지 못해 통사정했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이러면 또 일본을 깔볼지 모르지만, 일본은 얻어 갈 때는 우리한테 사정사정했더라도, 그 후 일본말로 다 번역해 놓았다. 우리가 팔만대장경을 자랑하지만, 정작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주변문화 가지고는 도저히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건 변화를 일으키는 자체 동력이다. 미술을 예로 들면, 서양은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낭만주의가 나오고, 낭만 가지고 해결이 되지 않으니 사실주의가 나오고 하는 식으로 모순에 대한 해결 책으로 새로운 주의가 나오고, 그것에 모순이 생기면 또 새로운 주의가 나오는 식으로 자체 동력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서양에서 뭐가 유행하면 그냥 배워 버린다. 서양에서는 까닭이 있어 시간 차를 두고 일어난 사조(思潮)가 한꺼번에 들어온다. 이것은 주변 문화의 한계로 그림 아무리 잘 그려도 주변은 주변이다.

이런 현상은 문화 전반에 걸쳐 마찬가지니, 중국에서는 다 이유가 있어 생겨난 종파가,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유행하기만 하면 그대로 들여온다. 대략 신라말 고려 초가 되면 교종(敎宗) 5교, 선종(禪宗) 9 산이 생겨난다. (*) 5교(敎)란 열반종(涅槃宗), 계율종(戒律宗), 법성종(法性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이고, 9 산(山)은 다음 표를 참조하라.

정혜결사(定慧結社)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의 임금과 귀족들은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고 믿었다.

신라 때부터 그랬지만 불교는 고려에서 국가불교, 귀족불교화 되어 체제의 수호자로서 기득권 층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어느 체제에서도 기득권층은 더욱더 탐욕스럽게 진화(?)하기 마련이다. 이리하여 고려 후기가 되면 불교는 완전히 타락해 버린다. 정화(淨化) 하지 않으면 불교가 살아남을 수 없게끔 되었다.

또한 천하는 합한 지 오라면 나뉘고, 나뉜지 오래면 합한다 라는 삼국지연의 첫머리처럼, 어지럽게 갈라진 종파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 후기 불교 개혁과 통합 움직임은 양쪽에서 일어난다. 하나는 교종(敎宗) 쪽의 백련결사(白蓮結社) 요,
다른 하나는 선종(禪宗) 쪽의 정혜결사(定慧結社)다. 긴 이야기 줄이면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주도하는 선종(禪宗)의 정혜결사(定慧結社)가 백련결사를 흡수하여 쇄신에 성공한다.

송광사 벽화 중 정혜사

가운데 두루마리를 읽는 분이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다. 송광사의 역사는 신라 말기까지 올라간다지만 (처음 이름은 길상사) 조국사가 정혜결사를 이 절-송광사에서 시작한 이래 유명하게 되고, 그 이후 16 국사(國師)가 주석(駐錫)하여 선종 종찰로 자부한다.

조계종은 정혜결사에서 나온 것이다. 조계종에 물으면 자기네 교리는 교종, 선종 모두 통합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통합이라 하더라도 누가 주도했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같은 남북통일도 주체가 서울이냐, 평양이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한국 불교의 대표가 조계종이고, 조계종은 선종이 주도하던 정혜결사에서 시작되었으니, 한국 불교는 선종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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