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송광사(松廣寺) - 순천 조계산

멍탐정고난 2023. 7. 27.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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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를 다녀온 사람은 많다. 돌아와 쓴 글과 사진도 엄청나 인터넷 검색하면 한정 없이 쏟아진다. 전주 부근 완주에 송광사란 절이 또 있다. 내가 더 보탤 것이 없고, 이 큰 절을 개괄(槪括)하기엔 내공(內功)도 딸린다. 그러나 기왕 다녀왔으니, 인상 깊었던 점 몇 가지 간단히 적어본다.

각서(刻書)

절 입구 어느 바위에 새긴 이름들이다. 옛날부터 자기 이름 남기기를 어지간히들 좋아했나 보다. 그래도 꽤 정성을 쏟았으니, 석수(石手)까지 데려와 새겼을 것이다. 괴발개발 쓰면 낙서(落書)고, 이렇게 파면 각서(刻書)고 그런 거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남기는 낙서는 심지어 역사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상당히 보편적이라 심지어 이집트 쿠푸왕의 대피라미드에도 짓던 일꾼들이 남긴 낙서가 남아있다고 한다.

선정비(善政碑)

일주문 근처에 비석이 하나 있다.

…도토포사겸전영장김공시풍선정비
(..道討捕使兼前營將金公始豊善政碑)
(토포사 위 부분은 지금 사진으로 판독하려니 잘 보이지 않는다.)

김시풍이란 이가 어떤 선정을 했는지 또 그 선정비는 왜 절 앞에 서 있는지야 내가 알 까닭이 없고, 다만 다음과 같은 추리를 해 볼 뿐이다. 선정비란 대개 사람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세우곤 했다. 그래야 여러 사람이 비석의 주인공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 줄 것 아닌가? 이 비석에서, 옛날부터 송광사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던 것을 짐작한다.얼마 전 서울의 어느 구청장 공덕을 기리는 표석을 크게 세웠다고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런 전통이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일주문(一柱門)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曹溪山大乘禪宗松廣寺). 소승(小乘)이 아니라 대승(大乘), 교종(敎宗)이 아니라 선종(禪宗)이니, 송광사와 조계종의 정체성(正體性)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송광사 일주문(一柱門)은 조계문(曹溪門)이라고도 한다. 조계(曹溪)가 자꾸 나오는데 원래 광동성에 있는 강 이름이고,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이며 남종선(南宗禪)을 일으킨 혜능(慧能)이 세운 (*)보림사(寶林寺)가 있는 산 이름이 조계산(曹溪山)이다. (*) 장흥 보림사는 중국 광동성 보림사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한국 선종은 결국 중국 선종-그 중 남종선을 배운 것이니 선종의 종찰인 송광사의 뒷산 이름을 그 조계산으로 지은 것이다.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이라고 쓴 현판이 하나 더 있다.

임경당(臨鏡堂)

일주문을 지나 절 옆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가면 그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아주 유명한 포토 라인이다. 송광사 사진 올리면서 여기를 빼 먹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나도 찍었다.

왼쪽 집은 임경당(臨鏡堂)인데, 물 위에 서 있는 정자 현판은 육감정(六鑑亭)이다. 임경당(臨鏡堂)이면 거울 (같은 물가)에 임(臨)한 집이고, 육감정(六鑑亭)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六根)을 고요하고 지혜롭게 비춰보는(鑑) 정자니, 서로 뜻이 통한다.

우화각(羽化閣)과 홍교(虹橋)

육감정 지나 개울에 무지개다리(虹橋)가 걸려 있고 그 다리 위에 누각(樓閣)을 지어 놓았으니 우화각(羽化閣)이다. 이름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 곧 도교(道敎) 냄새가 난다. 우화각-무지개다리 가운데 아래 부분에는 뭔가 삐죽이 튀어 나온 것이 있다.

나는 이 삐죽한 물건이 다리의 구조상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유야 어찌되었든 남근(男根)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글을 쓴 바 있다. 그 부분 줌을 당겨보니 귀두(龜頭)의 모양이 뚜렷이 잡힌다.

 - 모양이 귀두인 것은 맞지만 위치와 형태상의 기능은 아치를 지탱하는 포인트에 위치한 Key Stone이다. 키스톤을 넣으면서 장식을 더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아치(Arch)는 인장력(끌어당기는 힘)을 버티는 강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옛날에 기둥없이 긴 거리를 지탱해야하는 다리와 같은 구조물을 만들때 쓰는 구조이다. 다리의 하중을 양쪽으로 분산해서 땅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아치의 장점은 무거운 것을 위에 올리고 오래될 수록 더 다리가 꽉물려서 튼튼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리의 경우 밑에서 물이 불어나 위로 부력이 발생하면 취약해진다는 약점이 있다.

대웅전 삼세불(大雄殿 三世佛)

송광사 역사는 신라 말기까지 올라가고, 보조국사 지눌 (普照國師 知訥 : 1158-1210)부터 따지더라도 12세기 말(末)이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6.25 동란 등 난리와 그 외의 이유로 일어난 불로 법당이 홀랑 타는 일이 잦았다. 따라서 절은 오래 되었으되, 지금 모습은 근년(近年)에 있었던 중창(重創) 때 대부분 이루어진 것이다. 대웅전 부처님도 최근 중창 때 조성해 모셨다. 가기 전 최완수 씨의 명찰순례(名刹巡禮)를 꺼내 송광사 편을 다시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명찰순례(名刹巡禮) 권1 송광사 편, page 22/23/24
…..대웅보전 안에는 삼세여래(三世如來)와 사대보살(四大菩薩) 상을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는바, 필자가 20여 년의 연구 끝에 불상의 시원(始源)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양식사(樣式史)를 세계 문화사적인 안목으로 총 정리한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하 약(略)하는데 최완수씨 지휘아래 제자들이 불상을 고증하고 도면 작성했다고 썼다.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 씨는 우리나라 고미술사의 권위자며, 불교 예술에 대하여는 그 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이런 분이 송광사 중창을 자문하고, 새로 부처님을 모시는데 평생 배운 것이 다 들어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니 대체 어떨까 궁금했다.

법당 부처님을 찍지 말라는 경고문에 촬영 포기했다. 찍지 못하게 하면 대신 홈페이지에 그럴 듯 하게 올려 놓기라도 할 일이지. 인터넷을 뒤지는데 그 많은 송광사 사진 중 대웅전 부처님은 드물다. 모두 우화각으로 몰리고 이쪽은 별 관심 없는 모양이다. 간신히 찾아내서 크기를 늘렸더니 화질이 좀 그렇다. 가볍게 웃음을 머금고 있는 부처와 보살은 서로 비례가 잘 맞는다. 다니다 보면 국보니 보물이니 하지만, 왠지 균형이 맞지 않고 표정도 어색한 불상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오래 된 보물은 아니지만, 당대 제일의 전문가가 총감독한 작품답게 훌륭하다. 송광사 가면 우화각 일대 등 유명한 포토라인이나, 몇번 몇번이라고 번호 붙은 보물 뿐 만이 아니라 대웅전 삼세불과 협시보살 꼭 보라고 하고 싶다.

삼세불(三世佛)이란 과거, 현재, 미래불이다. 현세불인 석가여래를 가운데, 과거불인 연등불(燃燈佛)을 (마주 보아) 왼쪽, 56억 7천만년 뒤에 나타난다는 미래불인 미륵불을 오른 쪽에 모셨다.

협시보살 넷으로는 (*)좌문수 우보현(左文殊 右普賢)의 원칙대로 석가여래 좌측(마주 선 신자에게 오른 쪽)에 문수보살이 사자와 함께, 우측에 보현보살이 코끼리와 함께 있고, 연등불 옆에 지장보살이 석장, 미륵불 옆에 관음보살이 정병을 들고 서 있다.

이렇게 모신 내력을 최완수 씨는 명찰순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승보종찰(僧寶宗刹)인 송광사는 장차 미륵불이 출현할 때 까지 사자상승(師資相承)으로 석가모니불의 법등(法燈)을 지킬 책임이 있다. 이래서 대웅보전에 과거 연등불과 현재 석가모니불 및 미래 미륵불의 삼세불을 봉안하게 된 것이다……

싸리나무 비사리구니

송광사 승보전(僧寶殿) 옆에 큰 나무통이 하나 있다.

아주머니들 비켜주기를 기다렸다가는 사진 영영 못 찍을테니 배경 경치삼아 집어 넣을 수 밖에 없었다. 해설판이 붙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사리 구시
1724년 전라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 영조의 국제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이라 함. (약 7가마 분량의 밥저장), 송광사 3가지 명물(능견난사, 쌍향사, 비사리구시) 중 하나.

내가 전에 그건 싸리나무가 아니다 라는 글을 쓴 적 있어, 다시 요약, 인용한다.

....싸리나무는 ‘콩’과에 속하며 1-3m 정도까지 밖에 자라지 않는다. 나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사립문이나 빗자루 또는 회초리로나 사용한다...

천년, 만년이 지나도 싸리나무는 비사리구시에 쓸 만큼 굵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실은 느티나무? 송광사 비사리 구시의 목질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사람이 있다.  그랬더니 세포구조가 느티나무였다. 그래야 (느티나무라야)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느티나무는 괴목(槐木)이라고도 하는데, 금색이 도는 황갈색에 나이테가 선명하니 아름답고, 견고하며 잘 썩지 않는 훌륭한 재목이다. 송광사 뿐 아니라 다른 절에서 싸리나무로 뭘 만들었다는 것도 조사하니 다 느티나무 아니면 밤나무였다. 왜 느티나무를 가지고 싸리나무라고 했을까?

이유야 모르고, 다만 다음과 같이 추측만 할 뿐이다. 옛날 각종 불교용구에 느티나무를 쓰는 일이 많았다. 사리함(舍利函) 내지 사리(舍利)용구를 느티나무로 만들며, ‘사리나무’로 부르다가 ‘싸리나무’로 발음이 바뀐 것 아닐까?

지금 송광사에서 이 내용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해설판에 계속 싸리나무라고 적어 놓은 것은, 실제에 관계없이 싸리나무 비사리구시가 이미 신화가 된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신화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 송광사 기행문을 쓰면서, 송광사와 뗄래야 뗄수 없는 우리나라에 선종(禪宗)이 들어와 자리잡는 이야기를 간단히 적을까 했는데, 이미 인터넷 글 치고는 분량이 과(過)하다. 다음 글꼭지나 다른 기회를 보기로 하고 이만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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