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선릉 - 성종(成宗)의 국장(國葬)

멍탐정고난 2023. 8. 5.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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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의 훙(薨)

실록 성종 25년( 1494) 12월 24일

오시에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에서 훙(薨)하였는데 (上薨于大造殿) 춘추(春秋)는 38세이다. (오시(午時)-상오 11시부터 오후 1시. 대조전은 창덕궁에 있는 전각)

천자의 죽음은 붕(崩), 제후의 죽음은 훙(薨), 그 이하는 졸(卒) 이니, 중화적 천하질서에 마음으로 편입한 조선에서 임금의 죽음은 훙(薨)이었다. 식민사관에서는 바로 사대주의 운운할 텐데 듣기에 거북하지만 우리 역사에 그런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

성복(成服)과 연산군 즉위

실록 연산 즉위년 12월 29일

미시(未時)에 성복(成服)하였는데, 왕세자는 최질(衰질)을 입고 왕자(王子) 및 종친(宗親)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모두 최복(衰服)을 입고 들어와. (상복의 경우 (衰) 로 읽는다.)

세자란 두말 할 것도 없이 연산군이고, 성종이 승하한 1494년은 연산군 즉위년이 된다. 어버이가 돌아 간 임시에는 상주는 다른 정신이 없고, 일정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예(禮)를 갖출 수 있으니 유교에서는 그 시점을 정식으로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으로 본다.

 문상 가서 상주가 왼쪽 소매를 빼고 있으면 망인의 빈소에는 절을 해도 상주와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왼쪽 소매를  뺀 좌단(左袒)은 아직 성복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손님과 예(禮)를 차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징표기 때문이다.

 보통 시신에 옷을 갈아 입히는 소렴(小殮)과 관에 넣는 대렴(大殮) 뒤 제사-성복제를 지내고 정식 상복으로 갈아 입는 것이 성복(成服)이다. 이때 상주끼리도 서로 문상하고 비로소 문상 온 손님들과 절을 한다. 굳이 성복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성복하는 날 다음 왕이 즉위하기 때문이다.

실록 연산 즉위년 12월 29일

도승지가 유교함(遺敎函)을 찬궁 남쪽에 갖다 놓고, 상서원(尙瑞院) 관원이 대보(大寶)를 그 남쪽에 놓았다.(찬궁 : 빈전 안 임금의 관(棺)을 둔 곳)중략....왕세자가 최복을 벗고 면복(冕服)을 갖추고 나오매, ..중략

(王)이 인정전(仁政殿) 처마 밑에 자리잡고 의례대로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서, 여차(廬次)로 돌아가서 면복(冕服)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

성종대왕이 24일 승하하고 29일 성복하며 즉위하니 엿새 째 되는 날이었다.

"상중에 있는데 어찌 차마 곧 왕위에 오르랴마는, 대통(大統)을 오래도록 비울 수 없고 신기(神器)를 잠시도 비울 수 없으므로, 이에 마지못해 12월 29일 갑신에 창덕궁에서 즉위하며...." (실록)

왕위를 비울 수 없어 상중에 마지못해 하며 끝나는 대로 도로 상복으로 갈아 입는 즉위식이 성대할 수가 없었다. 즉위 장소는 빈전(殯殿-민간의 빈소)이 있는 궁궐 곧 임금이 승하한 궁궐의 정전 문 앞이다.

조선 초기에는 선왕이 승하하여 계승한 것이 아니라 양위(讓位) 또는 찬탈(簒奪)이라 선왕의 빈전(殯殿)이 있을 수 없으니 이와는 달랐다.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은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고, 정종(靖宗)과 세종(世宗)은 법궁(法宮)인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다음 문종의 즉위장소는 특이하다. 세종대왕은 말년에 병이 깊어 영응대군 댁 동별궁으로 피접나가 궁궐로 돌아 오지 못 한 채 승하한다. 빈전을 궁궐로 옮기니 마니 하는 논란이 있다가 그대로 영응대군 댁에 차리니 문종(文宗)은 궁궐이 아니라 영응대군 댁에서 성복하고 즉위하였다. 문종이 경복궁 천추전에서 훙(薨)하니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세조는 좋게 말해 양위 나쁘게 말해 찬탈이니 선왕 빈전에 관계 없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했고, 세조가 창덕궁 수강궁에서 승하하니 예종은 창덕궁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하였다

예종이 경복궁 자미당에서 훙하니 성종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이 아니라 그 문-근정문 앞에서 왕위에 나아가 이후 빈전이 있는 궁궐의 정전 문 앞에서 즉위하는 관례가 생겼다.

이제 성종대왕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니 다음 왕 연산군은 빈전이 있는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문-인정문 앞에서 즉위한 것이다.

인정문에서 본 인정전

바로 이 공간이 선왕이 창덕궁에서 승하하면 다음 임금이 즉위하던 곳으로 연산군도 저 인정문 앞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문 앞에서 간략하게 치르는 즉위식이라, 왕의 즉위식이라하면 얼마전 영국 찰스왕의 즉위식같이 거창한 것을 생각했는데 조선왕들의 즉위식은 그리 화려한 행사가 아니었다. 이것은 조선왕의 권력이 약함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다기엔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찰스왕보다 훨씬 강한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조선왕이 권력이 약하다보기는 어렵다. 아니면 성리학의 조선이 생각보다 더 치밀하게 도덕적이라 허례허식을 싫어하였기 때문일까?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알기 어렵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물어보고 싶은 일이다.

광평대군 묘로 산릉을 정함

연산 1년(1495) 1월 10일

산릉(山陵) 자리를 보고 와서 복명(復命)하는 서계에 이르기를,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묘가 첫째요, 그 다음이 정이(鄭易)의 묘요, 또 그 다음이 고양군(高陽郡) 관사(官舍)의 자리입니다.”

중략 

전교하기를,“만약 광평의 묘를 쓴다면, 반드시 옛 무덤을 파내야 할 것이니, (神)이 편안하겠는가. 온전한 땅을 선택하여 쓰는 것이 어떨까? 임원준을 불러 물으라.” 하였다. 필상 등이 아뢰기를, “조종의 산릉은 옛 무덤을 파내지 않은 데가 없으니, 다만 땅의 길흉만을 볼 것이지, 어찌 그런 폐단을 헤아리겠습니까.

중략

전교하기를, “그곳으로 정하라.” 하였다.

위 실록기사와 같이 선릉(宣陵) 자리에는 세종대왕의 다섯 째 아들 광평대군(1425-1444)의 묘가 있었다. 성종대왕의 능을 이 곳에 정하니 대군 묘는 대모산 밑으로 옮겨간다. 지금 강남구 수서동 대군묘 앞 도로가 광평로고, 일원터널도 처음 이름은 광평터널이었다.

필자는 최근 왕릉연구가 세 사람의 책을 읽었는데 한결 같이 이 부분을 먼저 있는 묘를 파 헤쳐 옮기고 왕릉의 산역에 따른 인원동원 과정을 전제왕권의 횡포로 보고 있다. 

다 자료를 가지고 하는 말이겠으나 사실관계 규명은 관심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그 해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람은 다 예단(豫斷)을 가지고 있고 그 예단에 따라 자기가 보고 싶은 자료만 골라 읽는 경향이 있다.

이 부분은 참으로 미묘하여 예단이 없으면 조사를 시작도 못한다. 그 많은 자료를 다 읽거나 나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미리 정해야 하는 데 이것이 바로 예단 아닌가? 그러나 그 예단은 충분히 말랑말랑하여 배치되는 증거가 나올 때  즉각 수정가능 해야만 하는데 이 왕릉연구가들의 해석은 이 예단이 너무 강하게 들어 간 것이 아닌가 한다.

위 성종의 릉을 정하고 광평대군의 묘를 이장하는데 다음 기사가 있다.

실록 연산 1년( 1495) 1월 11일

전교하기를, 대군의 (곧 광평대군) 무덤을 옮기되 마땅히 예장(禮葬) 할 것이요, 또 부인(夫人)의 집도 헐어야 할 것인데, 국가에서 일이 많아 관가에서 지어 줄 수는 없으니, 목면(木綿) 1천 필,정포(正布) 7백 50필,쌀 2백 석· 황두(黃豆) 1백 석을 주라.” 하였다.

어느 왕릉연구가는 묘를 파 옮기게 하고는 고작 저 정도 보상했다며 왕권의 횡포라는 서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글을 놓고 필자의 해석은 다르다. 조선 시대 경제지표에 대한 학식이 부족해 정확히 말 못 하지만 목면 1천 필, 정포 7백 50필, 쌀 2백 석, 황두 1백 석은 이장비용으로 그렇게 작은 보상은 아닌 듯 하며 무엇 보다 미안한 마음이 있지 않은가?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유행하여 이집트의 피라미드 하면 보통 절대왕권이 인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세운 것으로 해석하고 십계 같이 영화에서도 애급의 감독관들이 마구 채찍을 휘두른다. 그러나 오늘 날 다른 해석이 나오고 있으니 당시 이집트 인들은 파라오의 영생을 통하여 자신의 영생을 믿었기에 즐겨 피라미드를 쌓았고,

또 매년 되풀이 되는 나일강 범람 기간 중 별할 일이 없는 백성의 실업구제 차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계급투쟁사관은 19세기 처음 나올 때는 분명 참신한 이론이었지만 매사를 그런 식으로 본다면 에 도달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옛 사람들의 사고방식 상 선왕의 능을 쓰는 것은 국가의 화복(禍福)이 달린 일로 비록 대군의 묘라도 이장시켜 가며 길지(吉地)를 찾았다. 이것이 바로 민원을 샀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오늘 날 우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종 4년( 1422 임인) 11월 22일

호조에서 계하기를, “헌릉(獻陵) 길가에 밟아서 손해를 입힌 밭은 한 짐[一卜]되는 땅에 [大豆] 서 되[三升]씩 물어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건 너무 적지 않으냐. 한 짐에 서 되라는 것은 어떻게 계산하는 것이냐.”

중략

그런즉 이번에 길을 닦을 때에, 밭에는 모두 푸른 싹[靑苗]이었으므로 손실(損實)을 분간할 수는 없으나, 매 한 짐에서 실수(實收)를 서 말로 쳐서 그의 절반인 한 말 닷 되[一斗五升]를 주라.” 고 하였다.

이상 능행(陵幸) 길에 밟힌 곡식의 피해도 물어 주는 실록기사다.

조선 왕조 때 사유재산권 개념이 오늘 날 하고야 달랐겠지만 박통이나 전통시대 철거반 같이 무지막지 하지는 않았다. 이런 기사를 읽고도 전제왕권 운운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다 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작은 정부를 이상적으로 보았고, 과세도 상당히 약한편이었기에 정부부처들의 예산들은 항상 부족했다. 임금이 행차를 하거나 행사를 할때, 실록의 기사를 보면 상당히 많이 베푼 것으로 나와있지만, 상당히 현재까지도 위에서 내려주는 예산이 진짜 필요로 하는 맨밑의 백성까지 그대로 전달되는 일은 없다. 당연히 조선시대에도 왕이 100만원(예를 들어서) 내려주면 밑의 도승지가 30만원 띠고, 그 밑에 현감이 20만원 띠고, 이방이 20만원 먹고, 운송하는 군졸이 20만원 먹으면, 실제 백성에겐 10만원 전달되기 어렵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 현상은 심해진다. 광평대군의 후손이면 왕족 그것도 상당히 가까운 일족이니 이렇게 되진 않았겠다. 

묘호(廟號)를 성종(成宗)으로 정하다.

연산 1년( 1495) 1월 15일

중략

지금 상고하건대, 시법(諡法)에 ‘도탑고 후하고 순박하고 견고한 것은 (成)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중략

중조에서 내려주는 시호는 두 글자에 지나지 않으니, 성덕을 다 형용하기에는 부족하므로 우리가 사사로 시호, 묘호를 올리는 것입니다.

임금이 죽은 뒤 지어 올리는 시호(諡號)는 상당히 복잡하고 길어 성종의 시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다. 성종(成宗)은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 때 그 묘실을 가리키는 이름-묘호(廟號)이고 강정(康靖)은 중국에서 받아 오는 시호(諡號)고 인문헌무흠성공효(仁文憲武欽聖恭孝)는 위 실록대로 중국에서 보내 온 두 글자로는 성이 차지 않아 우리가 지어 올리는 존호(尊號)다.

공조덕종(功祖德宗)-공이 있으면 조(祖), 덕이 있으면 종(宗)이라고 해설하나 왕조를 개창 또는 방계에서 왕위에 오르면 조(祖), 이어 받으면 종(宗)으로 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언어 인플레 현상이 벌어져 조(祖)가 종(宗)보다 근사한 것 같이 들려 마구 조(祖)로 묘호를 정하고, 또 영종이나 정종같이 기왕에 종(宗)으로 했던 묘호까지 영조, 정조로 바꾸었다.

연산군 생모가 폐비(廢妃)되어 죽은 것을 알다.

연산 1년( 1495 ) 3월 16일

왕이 성종(成宗)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른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란 이는 어떤 사람이냐? 혹시 영돈녕(領敦寧) 윤호(尹壕)를 기무(起畝)라 잘못 쓴 것이 아니냐?” 하매, 승지들이 아뢰기를, “이는 실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廢位)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어 쫓겨나 마침내 사약을 받게 된 것은 역사상 유명한 일이나 성종대왕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여 연산군은 모르고 있었다.

이제 성종대왕의 묘지문(墓誌文)을 짓는 데 필자가 다른 글에서 설명한 바 같이 묘비(墓碑), 묘갈(墓碣)은 산 사람을 위하여 묘 바깥에 세우나 묘지(墓誌)는 저승세계를 위하여 땅속에 묻는 것으로 추호도 거짓이 있어서는 아니 되어 연산군의 진짜 외조부 이름이 나온 것이다.

윤기무(尹起畝)는 폐비 윤씨의 아버지고, 연산군이 혹시 이 사람을 잘 못 쓴 것 아니냐고 물어 본 영돈녕(領敦寧) 윤호(尹壕)는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친정 아버지다.

공식 기록상으로는 이런데 연산군이 정말 그때 까지 몰랐을까? 옛날 월탄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를 읽은 기억으로는 연산군이 대강 눈치 챈 것으로 나온다. 물론 작가 월탄의 상상력 부분이나, 필자는 그 쪽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장성한 왕자이며,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정보의 중심인 궁궐에 살던 사람이 그런 엄청난 사건을 모르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발인(發靷)

실록 연산 1년( 1495) 4월 2일

삼고(三鼓) 에 견전(遣奠)을 올리는데, 백관이 들어와 곡하고 집사(執事)가 빈전에서 애책(哀冊)을 읽었다. ....... 읽기를 마치자 뭇 신하들이 슬피 울고, 예를 마치자 재궁이 드디어 출발하였다.

삼고(三鼓)란 삼경(三更)으로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니 한 밤중에 발인한 것이다. 4월은 전해 12월 성종이 승하한 달로부터 다섯 달 째니 역시 천자는 7개월, 제후는 5개월, 경대부는 3개월, 사서인은 달을 넘겨 장사하라는 중화적 예법에 의한 것이다.

가끔 들었을 유월이장 6개월이 아니라 넘을 유(逾) 유월이장(逾月而葬)으로 돌아간 그 달을 넘겨 장사하는 것이다. 말이 사서인(士庶人)이지 아무나 달을 넘길 정도로 오래 끌 수 없으니 일반 평민들이야 적당히 며칠 지난 뒤 땅에 묻었을 것이다.

유월(逾月)까지 아니라도 옛날 장사는 요즈음 하루 이틀 보다야 훨씬 길었다. 이때 문제가 시신의 부패다. 필자 고향의 경우 지감(地坎) 곧 집 주위 땅에 임시로 묻었다가 발인할 때 꺼냈다고 한다. 이건 민간이고 궁(宮)에서는 석빙고에 저장한 얼음을 가져다 재궁 둘레 위 아래 사방에 쌓아 부패를 막았다고 한다.

 

선릉(宣陵)가는 국장(國葬)행로

어느 왕릉연구가 한 분이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성종의 국장 행렬은 밤 12시에 발인하여 동대문을 지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이곳 장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시(오전11시~13시) 였으니 12시간이 걸린 셈이다. 성종의 국장행렬이 배를 타고 건너간 자리는 오늘날 영동대교가 놓여졌고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가 됐다.

무슨 근거를 가지고 썼겠으나 의심이 난다. 우선 사소한 실수겠지만 영동대교는 옛 뚝섬이지 광나루가 아니다. 또 다른 연구가 한 분 글도 영동대교 운운하는 실수까지 같으니 이 부분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글을 베낀 것 같다.

정말 광나루 라면 ? 길을 돌아도 너무 돈다. 뚝섬이라면? 필자 어릴 때 봉은사 가려면 뚝섬에서 배를 타고 건넜다. 봉은사(奉恩寺)는 중종의 정릉(靖陵)의 원찰로 선정릉과 지척이다. 그러나 뚝섬은 강원도에서 뗏목으로 내려오는 땔감이 모이는 나루로 임금 거둥에 어울리는 진(鎭) 설비도 없었고 그나마 조선 후기에 개발되었다.

필자는 선릉으로 가는 국장 행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방증(傍證)은 있으니 즉 ;

실록 : 연산군 2년(1496) 9월 5일

왕대비와 왕비가 선릉에 나가 제사 드렸는데, 왕이 제천정(濟川亭)에 나가 맞이하였다.

실록 연산군 3년( 1497)  9월 25일

(*)자순왕대비께서 친히 선릉(宣陵)에 참배하고 돌아오니, 왕은 제천정(濟川亭)에서 대비를 마중하였다.

왕 즉 연산군이 대비를 마중 나갔다는 제천정(濟川亭)은 지금 한남대교 북단, 한남역 서쪽 한남동 537번지에 있던 정자니 이것은 대비와 왕비가 바로 옆 한강진(漢江鎭)을 건너 능에 다녀왔다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성종의 국상 그리고 그 뒤 임금의 능행 길 역시 한강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강진을 건넜을 것 같은데 .. 그러나 이 추정에 반하는 기사도 있다.

실록 연산  2년( 1496) 10월 8일

승정원이 아뢰기를, “선릉(宣陵)에 행행(行幸)하실 때, 노원역(盧原驛) 서쪽 길이 굽고 협착하여 밤에 다니기 어려우니, 청하옵건대 닦으소서.”

노원역은 옛 역참제도의 역으로 관할 구역이 정확히 어디서 어디까지 인지 모르지만 방위상 뚝섬이 이 노원역 관할일 가능성이 높다. 더 이상 추리는 위 왕릉연구가들의 자료를 보지 못하여 불가능하다.

 성종은 조선시대에는 세종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성군으로 추앙받았다. 사실 성종은 아내를 죽였고, 아들은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이며, 후궁을 10명도 넘게 두고, 16남 12녀의 아버지인 어마어마한 남자다. 왕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장인이 무려 한명회 였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즉 정통성이 모자랐기에 살아생전 신하들에게 강하게 나가본적이 없다. 엄청난 동물애호가라 궁중에서 동물을 많이 키웠는데, 원숭이를 키우려다 신하한테 쿠사리를 먹은 적도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보기에는 이렇게 강하지 않은 왕이 성군이었던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연산군은 성종때 축적된 신하들의 힘을 본인이 꺽어보려한 면도 있었을 것 같다. 연산군은 이렇게 정당화시키기엔 너무 처참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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