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비전(碑殿) - 비각,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앞

멍탐정고난 2023. 7. 26.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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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비각(碑閣) 이라고 부르는 비전(碑殿)은 국가상징가로 인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앞에 있어 대부분이 알고 있을 것이나 어쩐지 다들 무심히 지나칠 뿐 정확히 알지는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쓴다.

고종황제 기로소(耆老所) 에 들다. 1902 년 고종황제는 기로소(耆老所) 에 들었다.

기(耆)의 원래 글자모양은 다음과 같으니,

그 내원(來源) 은 ‘本義爲60歲的老人’ - ‘60 이 넘은 노인’ 이란 뜻이다. 기로소(耆老所)를 옛 지도 수선전도에 찾으니 육조거리 끝이니 현재 광화문 교보빌딩 근처일 것이다.

기로소(耆老所) 란 ?
조선왕조시대 정이품 이상의 관원으로 나이 70 이 넘으면 기로소 에 들어가는 데, 이때 나라에서는 전토(田土),염전(鹽田),
어전(漁箭),노비등을 내려 주었다. 하는 일은 임금의 탄일, 설, 동지, 기타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 모여서 하례(賀禮)를 행하고, 군신(君臣)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겼다. 다른 말로 기사(耆社) 라고도 하고 여기 들어가는 나이 많은 신하들을 기로당상(耆老堂上) 이라 하였다.

이쯤 되면 오늘날 양로원 정도를 상상하겠지만… 우선 군신(君臣)이 함께 하는 기구로 의전서열이 으뜸 이었고…... 주로 놀며 지냈다고 하지만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으면 왕의 자문에 응했던 바, 옛 조선의 정치가 주로 사대부들의 공론에 의한 것으로 기로당상(耆老堂上) 들이란 결국 각 정파의 원로이니, 권력서열로도 그 위상이 양로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두환이 물러나면서 꿈꾸던 국가원로자문회가 혹시 이런 것 아니었을까 ? 참 그는 상왕부(上王府)를 만들려고 했던가 ?
신하 뿐 아니라 임금도 나이 많으면 기로소(耆老所)에 든 예가 있으니, 태조(太祖) 대왕은 60세에 들었으며, 그 뒤 60을 넘긴 임금이 없다가, 숙종대왕이 59세에 곧 60 이 된다고 하여 입사하였고, 영조대왕은 51세에 ‘60을 바라본다 (望六旬)’ 하여 들어갔다.

1852년에 태어난 고종 황제는 1902년에 51세 즉 망육순(望六旬) 이니 영조대왕의 옛일을 좇아 황태자 나중 순종황제와 신하들의 권고로 입사한 것이다. 또한 이 해 1902 년은 고종이 1853년 즉위한지 40년이 되는 해다. (御極40年 )

비(碑)의 정식이름

1902년 고종황제가 기로소(耆老所)에 든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碑)를 세우니,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 란 긴 이름이 비(碑) 의 정식명칭이다.

大韓帝國 大皇帝寶齡望六旬 御極四十年 稱慶紀念碑

보령망육순(寶齡 望六旬): 51세가 되어 60을 바라보다. 어극40년(御極四十年) : 재위(在位) 40년이 되다.

나무칸살 바깥에서 찍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눈을 약 40cm 정도로 가깝게 대고 보면, 줄친 곳 왼쪽에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 글씨를 판독할 수 있으리라.

비전(碑殿) 인가 ? 비각(碑閣) 인가 ?
이 기념비(碑)의 보호건물이 바로 비전(碑殿)이다. 비전(碑殿)의 현판은 당시 황태자 즉 순종황제의 글씨다.

순종황제가 바보였다는 속설이 있는 데, 바보가 저 정도 글씨를 쓸 수가 있을 까?
그런데 현판에는 분명히 비전(碑殿)이지, 비각(碑閣) 이 아니다.

전통 건물을 부르는 이름에 크게 보아 여덟이 있으니, 전(殿), 당(堂),각(閣) ,합(閤), 재(齋), 헌(軒),루(樓),정(亭) 이다. 자세한 설명은 약(略)하고, 격(格 에 차이가 있으니 위에 적은 순서다. 제일 존귀한 전(殿)은 궁궐에서도 임금이나 왕비와 대비가 계시는 건물에나 붙일 뿐, 세자만 되어도 전(殿)을 붙일 수 없다. 예를 들어 경복궁에서 세자가 있던 동궁(東宮)의 건물이름은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요, 창덕궁에서는 중희당(重熙堂)이지 전(殿)이 아니다. 하물며 민간에서는 전(殿)을 감히 쓸 수가 없었다.

절에서도 부처님 모신 곳은 대웅전으로 전(殿)을 붙이지만, 사람을 모신 곳은 예컨대 조사당(祖師堂)하고 당(堂) 을 붙인다.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도 공자님을 모신 곳은 대성전(大成殿) 하고 전(殿)을 붙이지만 유생들이 모여 배우는 곳은 명륜당(明倫堂)처럼 당(堂) 이다.

황제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는 건물이니 대한제국 당시는 당연히 전(殿)을 붙여 비전(碑殿)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언제 비각(碑閣)으로 슬그머니 격하(格下) 가 되었을 까? 대한제국이니 황제니 하지만 이름만 바꾼 것으로 어찌 보면 호박에 줄 긋고 수박으로 부르는 꼴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광무개혁이라는 노력도 하였다. 이 개혁이 어째서 실패했는가 ? 과연 내용은 제대로 갖춘 것인가 ? 모든 것을 일본의 간계로 돌릴 수는 없고, 우리의 자아비판도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것이 일본의 간계이던, 우리 역량부족이던 간에 그 최후의 노력에 대하여 일정한 평가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고종황제나 순종황제나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치열하게 했다고 볼 수 있지만,결국 국민과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왕실과 왕가가 살아남기 위한 노력에만 치중했다.  (조선시대의 왕들의 사상에는 국가와 왕실 그리고 왕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왕실은 일본의 이왕가로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어 나라가 망하고도 잘먹고 잘살지 않았는가? 우리가 대한제국을 크게 평가하지 않음은 이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500년 역사를 이어가고도 마지막에 왕실의 누구도 심지어 이런 비를 쓰는 지도층누구 할거 없이 결국 친일과 매국에 앞장선 결과가 36년 일제 치하인 것이다.

현판에도 분명히 비전(碑殿) 이라고 써 있는 데, 해방된 지 60년이 넘도록 왜 아직 비각(碑閣)으로 부르는가 ? 대한제국 대황제(大韓帝國大皇帝)를 기념하는 비가 있는 곳은 마땅히 비전(碑殿)으로 이름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지금은 교보빌딩의 정원 조형물 같이 되어 있지만 지을 때는 황제를 기리는 비전(碑殿)답게 위용을 갖추었다.

외부도 만세문과 담으로 둘러 싸여 있었으니 다음은 비전의 일제 때 사진이다.

일제를 거치면서 담도 없고 울도 없어 졌다. 만세문은 어느 일본인이 떼어가 충무로에 있는 자기집 문으로 삼았다가 6.25 때 일부 부서졌다고 한다. 그 후 1954년 만세문을 되찾아 복원하고 관리 해 오건만 담은 아직도 없다.

비(碑)로 다시 돌아가…. 비문(碑文)은 윤용선(尹容善)이 지었으며, 글씨는 당시 행서(行書)에 능한 민병석이 썼다.

민병석 은 경술국치후 일본 자작(子爵)에, 이왕직 장관,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친일인사다. 나라야 망하던 말던 지도층 인사는 전혀 고통이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언제나 권력의 그늘에 다시 둥지를 틀었던 것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다. 얼마 전 작고한 전 대법원장 민복기 씨는 민병석의 손자다.

도로원표(道路元標)

또한 비전(碑殿) 에는 유명한 도로원표(道路元標) 가 있다. 

 

구한말 도시계획이 워싱턴 DC를 본 땄다는 서울대 이태진 선생의 주장이 있다. 아래 사진은 워싱턴 DC 와 일본 동경의 도로원표다.

다시 우리 비전(碑殿)의 도로원표를 보면 과연 일본 것이 아니라 미국 것 을 닮았다.

이거 하나 가지고…워싱턴 DC 도시계획을 따랐다는 결론은 낼 수 없지만, 여러 다른 증거-evidence 와 같이 곁들이면 이야기(Story)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도로원표도 이태진 선생이 제시하는 여러 증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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