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서산 마애불(瑞山 磨崖佛)

멍탐정고난 2023. 8. 1. 23:53
반응형

 

전국 어디나 트레킹 코스 개발이 한참이니 서산(瑞山)시도 (서산은 군()인줄 알았는데 요새 웬만하면 다 시()) 아라메 길을 시장(?)에 내 놓으며, 아라는 물 또는 바다요는 산이니,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길이라는 설명을 곁들인다

라지만 서산 일대가 비산비야(非山非野)-나직나직한 야산이고 바다는 코스 끝부분에야 살짝 보이고, 물은 작은 개울 정도니 이름이 길의 특성을 썩 잘 대표한다고 하기는 어렵고, 다만 발음이 그럴 듯 하여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라메길 트레킹 가자는 계획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무엇보다 길 따라 즐비한 문화재에 마음이 끌렸다.
https://www.seosan.go.kr/tour/contents.do?key=5990

서산 마애불, 보원사 옛터, 개심사 등등 모두 그윽하고 또 그윽한 곳들 아닌가?

따라서 체력단련이나 완주 따위(?)보다는, 만만디로 노닥거리며 옛 백제의 자취에 젖어 들고 싶었지만, 그건 내 취향일 뿐, 단체다 보니 약간 머무적거리면 그냥 등이 떠밀리는 것이 아쉬웠다. 돈만 주면 어디나 구하는 간장 게장, 거 뭐 꼭 시간 맞춰 먹으러 가야 하나? 어쨌거나 그 유명한 서산 마애불, 이번에 또 만난 소감 몇 자 적어 본다.

용현 계곡

양쪽 절벽 사이로 난 길은 승용차 간신히 비껴 갈 정도의 폭이다. 길 아래 흐르는 개울은 배 띄우기는 수량이 턱도 없다. 개울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돌 계단이 시작되고 1-2분 가량 굽어 돌아 올라가면 암자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 너머 문에는 불이문(不二門)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들어가면 흰 절벽이 솟아 있고 양각(陽刻)된 조각상 윗부분이 보인다.

다시 계단이 끝나면 마침내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 정면에 나타난다.

이 불상(佛像)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일까?

세계가 아직 서양 중심으로 돌아가고, 교육도 그런 식으로 받다 보니 노란 인종 주제에 머리에는 그리스 로마가 표준이라는 생각이 강고하다.

실물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서지만 학교 교과서부터 그리스 조각에 익은 눈에 이 서산 마애불은 정교(精巧)하고는 거리가 먼 듯 보인다. 무른 대리석에 비해 단단한 화강암이라 새기기 어렵다지만 솜씨가 영 조잡하게 느껴 진다. 조각 기술 이전에 미적 감각 자체가 촌스럽지 않느냐 하는 기분인 것은 주인공인 가운데 부처님이 퉁방울 눈 넙데데한 코에 도저히 미남으로봐 주기 어려운 때문인지도

사실 우리 전통의 조각들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그리스로마-르네상스로 이어지는 서양의 조각가들의 작품에 비교하자면 더 아름답다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머 예술을 놓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고, 그게 문화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겠다.

그렇다고 규모가 거대하냐 하면 본존불 높이 2.8m, 우협시 보살 입상 높이 1.7m, 좌협시 반가사유상 높이 1.66m로 그저 아담한 정도다. 대체 뭘 가지고 백제의 미소니 해 가며 그리도 요란스럽게 떠드는 것일까?

아줌마

몇 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내 뒤를 따라 오던 어느 꼬마가 마애불이 보이자마자 와 아줌마다!’ 하고 탄성을 지르던 기억이 난다. 아이 눈에 아줌마로 보이면 원 제작 의도야 부처든 보살이든 또 뭐든 간에 이미지 상으로는 아줌마가 맞다. 아줌마도 요사스러운 귀부인이 아니라 몸빼바지 입은 펑퍼짐한 시장 아줌마가 환하게 웃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산신령과 마누라들

다음 일화는 유홍준교수가 소개한 덕분에 아주 유명해 졌다. 이 마애삼존불이 발견 된 것은 1959년이다. 여기서 발견이란진작에 있던 불상을 학계에서 그 존재를 처음 깨달았다는 뜻이다. 1959년 근처 보원사 옛터 조사하러 온 (홍사준 선생이 이끄는) 팀이 마을 사람들에게 근처에 불상이 혹시 없느냐고 물으니, 부처는 모르겠고 산신령이 큰마누라, 작은 마누라 거느린 것은 있다 하여 앞장 세워 좇아가 발견한 것이 이 마애불인데, 그때 안내한 사람 설명이 산신령님 작은 마누라가 다리 꼬고 앉아 살살 웃으며 용용 죽겠지 하니, 큰 마누라가 성질을 못 이기고 짱돌 던지려는 장면이라고 하더란다.

미술사 학자들이야 가운데 부처님이 어떻고,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부처님을 좌우에서 모시는 보살)이 누구고 하는 식으로 나오지만 그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제각각 다르다.

본존불, 곧 가운데 부처님-보기에 따라 산신령은 석가여래다 아니 아미타불이다로 의견이 갈려 있다. (대체적으로는 석가여래로 본다) 좌측(보는 곳에서 오른쪽) 협시보살, 곧 다리 꼬고 손으로 볼따구를 찌르며 배시시 쪼개는 작은 마누라 포즈를 먹물적으로 풀면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란 다리는 반 가부좌를 틀고, 얼굴은 살짝 숙이고 그 뺨에 손가락을 대고 뭔가 생각-사유에 잠긴 듯한 자세를 말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있는 그 유명한 반가사유상의 포즈를 한 불상들을 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른다.)

국보 제 83호 금동 미륵 보살 반가사유상

이 반가상(半跏像) 미륵보살 이라는 데는 모두 같은 의견이다. 그러나 짱돌 든 큰 마누라-유식한 설명으로 구슬을 두 손으로 감싸 받쳐 든 (捧珠) () 협시보살에 대하여는 제화갈라(提和竭羅) 보살 설과 관음(觀音)보살 설이 맞서고 있다. 제화갈라는 과거불인 연등불(燃燈佛)의 아바타고, 가운데가 석가여래 곧 현세불(現世佛)이면, 반가상은 미륵, 미륵은 미래불이니, 불상은 차례로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을 이루어 삼세불(三世佛) 개념에 맞는다.

그래서인지 현장 해설판에는 우협시가 제화갈라보살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현세에서 도와 주는 관음보살을 미래에 나타나는 미륵과 함께 부처님을 좌우에서 모시게 하는 것 또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보기에 따라 달라 지니, 산신령과 큰마누라, 작은 마누라 인들, 몸빼 입은 시장 아줌마인들 어떠하랴?

백제의 미소

불교 교리나 미술사적 분석이야 그거 가지고 밥 먹는 사람들 할 일이고, 이 마애삼존불이 사람을 끌어 들이는 힘은 바로 그 웃음으로, 안내판이고 문건이고 모조리 백제의 미소로 도배를 해 놓고 있다. 불상 조성 연대가 백제 때임은 분명하고, 백제인들은 나름 가장 이상적 웃음을 새겼을 테니 백제의 미소란 꽤 그럴 듯한 표현이다.

백제의 미소란 말은 불상 발견 다음 해인 1960년 김원룡 선생이 제안했다지만, 한참 동안 큰 호응 없다가 갑자기 너도 나도 백제의 미소를 입에 달고 다니니, 그 붐의 공로자(?)는 아무래도 유홍준 교수가 아닐까 한다. 나은 이는 삼불(三佛; 김원룡의 호)이로되 기른 이는 유홍준이라고나 할 까.

불상의 조성 연대

현장 해설판에는 마애불의 조성 연대를 서기 600년경이라고 적어 놓았고 학계의 대체적 견해도 그러하다. 나야 뭐 의견 낼 정도의 학식은 없고, 그렇게 추정해 나가는 과정을 읽어 보니 논리적으로 별 무리가 없는 합당한 결론이라는 정도만 느낄 따름이다. 비록 잘 모르는 분야라도 이론 전개 과정이야 다 공통이니, 이성(理性)만 갖추고 있으면, 읽고 이해 및 판단 곧 통박 재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나?

돌에 새긴 조각은 DNA 검출도 안되고, 탄소 동위 원소 측정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불상 중에는 명문(銘文)이 적혀 있다던가 하여 조성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 진 것들이 있다. 그런 확실한 불상을 연대 별로 늘어 놓은 다음, 감정 대상이 기법이나 양식 상 어느 것 뒤고 어느 것 앞이다라는 식으로 끼워 넣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니 왜 이것 뒤고 저것 앞이라는 추정이 논리적으로 치밀, 타당해야지 아니면 말고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아무리 정밀하게 추정해도 지금까지 모르던 사실이 튀어 나오면 흔들릴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본존불(本尊佛)

가운데 여래 입상은 짙은 눈썹 아래 왕방울 눈, 굵은 코, 벌어 진 콧망울에 콧구멍은 위로 살짝 들려 있고, 볼에는 살이 두툼히 붙어 있다. 밑으로 늘어진 연꽃을 밟고 있는 발가락이 유난히 큰데 그게 또 불적(佛跡-부처님 발자취)을 상징해서 크게 만든 거 아니겠느냐는 해설이 있다.

오른손을 들어 바닥을 앞으로 보임은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는 시무외인(施無畏印), 내려 역시 바닥을 보이는 왼손은 원하는 대로 이루리라는 여원인(與願印) 이다. 이 시무외여원인의 의미를 알면서 나는 혜화동 성당인가에 벽에 있던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는 구절을 떠 올렸다.

교리는 서로 다르더라도 (나는 다른지 같은지 알지 못하고, 교리에 관심 자체가 없다) 종교가 신자에게 다가가는 방식, 사회에 대한 기능은 다 같지않을까? 종교가 두려워 말라는, 또 원하는 대로 이루리라는 메시지를 비록 빈말이라도 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믿고 싶겠나?

왼손-여원인(與願印)은 끝의 두 손가락이 구부러져 있으니 원래는 늘어진 옷자락을 잡던 것이 도상화(圖像化) 되었다는 설명이다. 옷은 인도식 편단우견(偏袒右肩)이 아니다. 편단우견이란 왼쪽 소매만 걸치고 오른 쪽 어깨는 드러내는 방식으로 더운 인도에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입고 다니는 사람 많다.

불상(佛像)이 처음 들어 올 때 중국인들은 이 편단우견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듯. 추운 중국 북부에서 그런 식으로 옷 입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아 결국 중국식 두루마기를 입히는 양식이 나타난다. 나중에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가는 승려들이 늘어나며 왜 편단우견 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가운데 여래는 중국식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불상 연대 편년의 여러 지표 중 하나이다.

동서양 공히 성상(聖像)의 머리 부분에 빛을 상징하는 원을 넣는다. 서양에서는 후광(後光)이라고 하고, 불상은 두광(頭光) 또는 광배(光背). 가운데 여래 입상의 광배는 불꽃 모양 겉테가 있고 그 안에 작은 부처님 -화불(化佛) 셋이 들어 있다. 다시 안테가 있고 그 속으로 연꽃이 둘러싸고 있다.

좌협시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

의자에 앉아 왼발은 땅을 짚고 오른 발을 무릎 위에 올려 반가부좌를 틀었다. 오른 팔을 무릎 위에 기대고 손가락을 오른 뺨에 대고 생각에 잠겼는데 보통 사유상에 보이는 고뇌의 흔적은 없이 얼굴 가득히 환희에 차 있다.

윗도리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목에 목걸이가 걸려 있다. 허리에 매어 있는 치마는 무릎 아래를 덮었다.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다시 주위를 연꽃이 둘러 싼 두광(頭光) 안 테를 바깥 테가 다시 둘러 쌌는데 위쪽으로 촛불 모양 불꽃이 슬며시 올라와 있다. 발 아래로 꽃잎이 아래로 쳐 진 연꽃이 받치고 있다.

우협시 관세음보살(또는 제화갈라보살)

미륵과 거의 같은 모습이나 앉지 않고 서서 역시 환희에 가득 차 있다. 두 손으로 구슬을 받들어 중앙으로 쳐 들었는데 어깨에는 옷이 걸쳐 있다. 화관(花冠) 중앙에는 꽃술이 도들새김 되었고 양 옆으로 꽃잎이 흘러 내린다. 

두광은 미륵과 같이 촛불 형태고, 발아래 복련(覆蓮) 대좌(臺座)도 같다

- 여기 좌, 우의 기준은 가운데 본존불(석가여래)의 기준이다. 보는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헷갈릴 수 있다.

깨달음의 환희

주불(主佛)과 두 협시보살이 활짝 웃는 모습을 아줌마의 미소, 또는 첩과 사내의 웃음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신심 깊은 불자(佛者)들은 깨달음-정각(正覺)을 얻은 후 환희에 가득 찬-열락(悅樂)으로 보지 않을까?

보호각(保護閣) 흔적

발견 후 대단한 보물인 것을 깨닫고 국보 84호로 지정하고 보호한다고 보호각을 세워 둘러 쌌다. 그런데 집 안에 가둬 놓으니 빛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기도 어렵고 보호도 잘 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말이 많다가 몇 년 전 철거했는데 그 흔적-보호각 기둥 박은 구멍이 남아 있다.

철거 흔적
철거전 보호각의 모습

과학이 숨어 있다는 설()에 대하여

이 마애불에 대단한 과학적 계산이 숨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마애불이 향하는 방위는 동동남 30, 동짓날 해 뜨는 방향 일년의 시작을 의미하며, 일조량을 가장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다. 마애불 정면에 산자락이 펼쳐 있어 바람을 막아 준다. 그리고 마애불 벼랑 위로 불쑥 내민 큰 바위가 처마 역할을 하여 빗방울이 곧장 떨어지지 않도록 하고, 또 새겨 진 면석 자체가 아래쪽 80도 기울기라 더욱 효과적으로 빗방울을 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운운

글쎄 과연 그럴까? 잘 믿지 못하겠다.

서양에서는 이런 방향으로 연구를 일찍부터 해 왔다. 스톤 헨지나 잉카 마추픽추 신전이 실은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이라던가, 피라미드 안 깊숙한 곳 파라오의 묘실에 북극성인가 시리우슨가 하는 별 빛이 들어 오게끔 설계했다는 둥.

우리나라 연구자도 그런 시도를 해 보았지만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 힘만 들고 잘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결론 냈다가 괜히 망신들만 당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신라 사람들이 석굴암 조성하며 그 비례를 구할 때 루트-무리수(無理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 류(). 웬 무리수? 우리 조상들은 그런 식으로 인생 살지 않았다.

사실 중국에서는 전한시기에 이미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서가 나왔고, 여기에는 2차방정식과 제곱근 즉 루트를 다루는 식이 나온다. 그리고 이 구장산술이 우리 삼국시대 신라에 전해진 기록이 있다. 그래서 석굴암에 무리수를 적용했다는 유홍준 교수님의 말은 사실 근거도 어느정도 있다고 보인다. 다만, 서산 마애불의 스타일 자애로운 미소와 자연적인 바위 벽면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렇게 치밀하게 계산되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듯 하다. 하지 못한게 아니라, 그렇게 짓지 않은 것으로 보는게 자연스럽달까?

야박하게 딱 각도 재가며 두부 자르듯 하는 식으로는 저 푸근한 시장 아줌마 미소가 절대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요리할 때도 소금 조금, 뭐 큰 숟갈 하나에 중간 불에 미긋미긋 끓인다 해야지 뭐 몇 그램에 온도 몇 도에 몇 분 어쩌고 하면 신경질 내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법궁인 경복궁 조차 정남이 아니었다. 방향이 남쪽이면 대충 봐서 보기 좋게 지으면 되는 것이다. 하다 못해 돌 축대나 성벽도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고 막돌 쌓듯 했는데 그게 또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 보면 희한하다.기술면으로 보면 이쪽이 더 어려울 것이다.  ( 건축학도인 내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 예외적으로 남아있는 것이고 나머진 다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돌 쌓고 싶어 그랬다기 보단, 그걸 정확하게 재단할 기술-자본력이 부족했으니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닐까? )

실례지만 동동남 30도는 정확하게 잰 것일까? 재서 나온 각도로 믿어야 정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것도 왕왕 틀린다. 경복궁 방위가 틀어 진 각도도 누구는 3.8도다 아니 5.3 도다 하는 판이다. 와이당에 나오는 대로 믿을 놈 하나 없고 직접 재 봐야 한다.

그런데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이 동동남 30도가 과연 맞나? 의심이 들어 잠깐 인터넷 검색해 보니 29.4도 라는 문건이 하나 나온다. 어느 게 맞는 지 모르지만 30도와 29.4도는 다르다. 이런 시츄에이션에서는 대충 반올림하고 그러면 안 된다.

면석 기울기 80도도 자연석이니만큼 부위 별로 각도가 다를 것이다. 내 생각에 적당한 위치 골라 면석 대충 다듬고 그냥 정성을 다해 보기 좋게 새겼을 것 같다.

백제 문화와 신라 문화

이번 답사에서 이쪽 유물 전문으로 해당 분야 박사 학위 가진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은 석굴암 본존불은 근엄하여 사람을 겁주는 반면, 이곳 부처상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신라와 백제의 문화 차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한다.

박사님 말씀에 나 같은 무명소배(無名少輩)가 감히 토 달기 어렵지만 박사라고 늘 옳은 것은 아니고, 독단에 빠질 우려는 오히려 더 높고 또 전공자는 자기 분야에 과도한 애착-익애(溺愛)를 보이는 경향이 있고, 또 서로 얼굴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니 한 마디 붙인다.

먼저 석굴암 부처가 사람을 겁준다는 말-그건 좀 아니다. 내 은사(恩師) 한 분은 누가 만일 석굴암 부처 같은 얼굴을 가졌다면 그 사람 완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한 적도 있다.

하여튼 석굴암 부처는 옷자락을 여미게 하고 여기 부처는 푸근하다는데 동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걸 신라와 백제 문화의 차이로 일반화 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 그런 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특정 유물에 한해서만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온 국력을 기울여 조성한 최고의 걸작이다. 그런 고급 예술품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엄숙해 지는 법이다. 여기 서산 마애불 조성에 백제가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국사와 석굴암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나는 서산 마애불을 보면서 조선 분청사기 생각이 났다. 고려 청자와 조선 청화백자의 날씬한 자태는 누가 봐도 최고의 예술이지만 친하기는 어려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여신(女神)이다.

그에 비해 분청사기는 걸작 따위는 다 잊어 버린 채 그냥 편안한 주막집 주모다. 즉 최고의 걸작은 그렇게 편안하기 어렵고그런 것은 오히려 약간 낮은 급에서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신라에 석굴암 부처만 있는가? 삼화령 애기 부처 앞에서 겁먹을 사람 누가 있으며 경주 남산에도 응석부릴 만한 할머니 같은 부처상 많다.   

이상으로 글을 마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