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목릉(穆陵)-선조(宣祖)의 무덤

멍탐정고난 2023. 7. 2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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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릉(穆陵)은 조선 14대 선조대왕(1552 生, 재위 1567-1608)의 능(陵)으로 대왕과 함께 원비(元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1555-1600),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 (1584-1632)의 능침이 같이 있다.

선조 어진 전립본으로 알려져 있는 초상화이지만, 추정 근거가 부족하며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드라마의 영향인지 선조(宣祖)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아주 낮다. 그러나 드라마는 실재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등장인물과 극중 사건이 대부분 실재라도 결국 배경 소도구일 뿐 전체적으로 허구의 이야기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난 날 이 나라를 움직이던 이들이 우리 보다 덜 똑똑하거나,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 오늘 우리가 아는 정보를 당시는 왜 몰랐느냐고 나무라는 것은 공정한 일이 아니다.

후궁 계통으로 처음 즉위

1567년 명종대왕이 재위 22년 만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昇遐)하였다.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는 4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친(至親) 중에 정궁 소생이 없었다. 이에 중종 대왕의 후궁 창빈 안씨 소생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하성군 (河城君)을 맞아 들여 대통을 이으니 선조 대왕이다. 국초부터 명종까지 비록 장자(長子)는 아니로되 모두 정궁(正宮)소생이 왕위에 올랐으나, 후궁의 자손으로는 선조 즉위가 처음이었다. 10 대쯤 내려가면 대(代)가 끊어지게끔 되어 있다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이렇다 하는 집안 중 양자(養子)로 가계를 잇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그러고 보면 명문(名門)도 생물학이 아니라 문화적 (후천적 교육에 의한) 집단이다.

선조가 임금으로는 14대지만 생물학적 계통은 태조부터 9대 째다. 그 이후 왕은 정궁 소생이 오히려 드물고 상당수가 후궁 소생이다. 또 선조 이후 정궁이고 후궁이고 간에 왕자의 숫자가 줄어드니 그 즈음해서 조선 왕실의 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 아닌지? 종가(宗家)인 왕실은 이렇지만 전주 이씨는 수백 만으로 불어 났으니 방계가 원래 생명력이 더 왕성한 법인지? 또 조선 후기 정궁들은 왕자건 공주건 소생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 부덕(婦德) 높은 요조숙녀(窈窕淑女) 보다 부적절한 관계 쪽이 후손을 얻는데 더 유리한 것인지?

종통(宗統)

선조는 종법(宗法) 상 생가(生家) 덕흥대원군 쪽에서는 출계(出系)가 되고 명종(明宗)의 사자(嗣子)로 들어 간다.

왕실 종통도(宗統圖)-국사편찬위원회 이영춘 씨 자료

1과 2가 다른 점은 명종이 누구의 뒤를 이었느냐는 점으로, 1번에서는 명종이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중간에 떠 버린다. 2번 사계 김장생 (沙溪 金長生 1548-1631)의 인식에 따르면 명종은 인종의 뒤를 이었다. 따라서 1번에 의하면 인종은 선조의 아저씨나, 2번으로는 할아버지고 이것이 사림파가 생각하던 종통 체계다. (쉽게 따지면 인종이나 명종이나 선조의 아저씨다)

만력 5년(1577 선조 10년) 정축에 영정왕비(榮靖王妃) 박(朴)씨가 서거하자, 예조는 ‘숙질(叔姪)의 복(服)을 따라 재최기년(齊衰期年)을 입어야 한다.’ 하고, 상신(相臣) 박순(朴淳) 등은 ‘대왕은 영정왕비에게 조손(祖孫)의 의가 있으니 체(體)를 이은 중함으로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니, 대왕이 그 의논을 따라 마침내 삼년상으로 결정하였다. (선조 지문(誌文) 중)

영정왕비란 인종 비(妃) 인성왕후 박씨다. 선조는 인종의 질자(姪子)니 1년복을 입자는 것이 예조(禮曹)의 안이었다. 그러나 박순 곧 사림파 생각은 선조는 종통 상 인종의 손자다. 손자 상복도 1년이지만 아버지 없이 승중손(承重孫)할 때 가복(加服)하는 것이니 3년을 입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선조는 사림파를 따랐다. 선조 때는 비교적 간단히 정리되지만 조선 후기 이런  예송(禮訟)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이 예송(禮訟)을 두고 식민사관에서는 쓸모 없는 헛된 명제에 나라의 힘을 다 쏟은 조선인의 고질적 병폐 쯤으로 설명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의 정통성은 선거에서 나오지만 군주제에서는 적통(嫡統)여부다. 적장자(嫡長子)가 왕이 되지 못하고 중서자(衆庶子)나 또는 인조 반정 같이 쿠데타로 왕위에 오를 때 정통성을 여하히 정리하여 세우느냐는 정치의 핵심이 될 수 밖에 없다. 필자 학교 때만 해도 시험에 다음 중 국가가 아닌 것 하고 보기가 나오면 중공을 골라야 했다. 중공은 침략자로 유엔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으니까. 대통령이 두 번 씩이나 방북을 했지만 북한은 국가가 아니고 반정부단체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 합법정부임을 알리는데 쓴 돈이 얼마며, 해방 이후 이제까지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또 얼마인가? 먼 훗날 자손들이 그때 할아버지들은 뭐 그런 일에 서로 죽이고 그랬지? 미쳤던 것 아니야? 하면 우리는 좀 서글프지 않을까?

조선 후기 예송(禮訟)은 겉으로 상복을 어떻게 입느냐 같이 보이지만 내용은 왕위 계승이 정통(正統)이냐 윤통(閏統)이냐 가 핵심이니 비록 기준은 오늘 날과 다르지만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이 할 일이 없어 머리 터지게 싸운 것이 아니다.

목릉(穆陵)의 성세(盛世)

오늘 날 선조시대를 붕당이 생기고 임란(壬亂)을 당해 무능하기 짝이 없던 암울한 세월로 여기지만 옛 선비들은 ‘목릉(穆陵)의 성세(盛世)’로 불렀으니, 역사의 평가는 시대마다 달라진다. 이황, 이이, 유성룡, 정철, 이항복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이 즈음 다 나오고, 네 차례 사화로 무참한 변을 겪던 사림파가 선조 이후 비로소 조선의 공론을 좌지우지하게 되니 사림으로서는 그런 이야기 할 만하다.

사림파의 위상이 선조 이후 확고해 진 것은 사화(士禍)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실력을 쌓기도 했지만, 정통성이 약한 선조는 사림에 기대고 싶기도 했을 것이고 또 입지가 약하면 에프엠 원리 원칙대로 나가기 마련이니 쟁점이 있을 때 사림파 쪽이 원칙론일 테니 그쪽 손을 들어 주었을 것이다. 붕당의 해석에는 일제 식민사관의 찌꺼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후대로 내려 가며 당쟁의 말폐(末弊)가 생기지만 처음에는 오늘 날 정당 정치에 비견할 면도 있었다.

사실 선조는 일본의 통일에 맞물려서 임진왜란의 시기의 왕으로써 다른 조선의 왕에 비해 불운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조의 도망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고, (사실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일본군에 잡혔으면 그것으로 패배확정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를 나름 하였으나, 예상보다 너무 큰 규모의 침략에 그대로 당했다. 군사적으로 임진년의 일본군의 규모는 일본군의 보급역량을 압도적으로 뛰어넘는 규모로서 조선이나 명이 예상치 못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 와중 이순신을 견제하는 것이나, 자신을 대신해 현장에서 뛰었던 광해군을 견제하는 등 비겁한 면모는 사실인데, 이건 선조 자신의 정통성 부족(후궁 소생의 첫 왕)을 핑계로 들 수는 있겠으나, 본인이 대장부같은 면모는 없었고, 본인의 안위와 위신에 편집증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목릉의 성세라고 여기는 이황, 이이, 유성룡, 정철, 이항복 같은 위인들이 이 시기에 집중된 것은 임진왜란 같은 위기에 맞았기 때문에 위기를 맞이하여 많은 영웅들이 돋보일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선조가 최악의 임금이라는 것은 선조 자신에게는 가혹한 평가일지 모르겠으나, 그 시기의 조선 백성들에게는 최악의 시대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선조 본인은 이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또한 아들(광해군)에게 그렇게 까지 가혹하게 정치질을 해야했었나하는 측면에서 인간적으로 정말 별로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한다.

선조(宣祖)대왕 승하
선조 수정실록 41년( 1608 무신 2월 1일)
이날 미시에 상의 병의 갑자기 위독해져 정릉동 행궁(行宮)의 정전(正殿)에서 훙(薨)하니, 나이 57세였다. 세자가 즉위하여 현문의무성경달효(顯文毅武聖敬達孝)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묘호(廟號)는 선종(宣宗),능호(陵號)는 목릉(穆陵)이라 하였다. ,…… 명조(明朝)에 고부(告訃)하니, …..소경(昭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릉동은 정동(貞洞)이고, 행궁은 임시로 머무는 궁궐이란 뜻이다. 임란 후 도성의 궁궐이 모두 불타 옛 월산대군의 저택을 비워 궁을 삼으니 훗날 경운궁 곧 덕수궁이다. 묘호(廟號)는 처음 종(宗)을 붙여 선종(宣宗)으로 했다가 나중 조(祖)로 바꾼다. 이른바 공조덕종(功祖德宗)론에 의하여 괜히 조를 더 높게 여긴 탓도 있었다.
광해 즉위년( 1608 무신) 36년) 2월 17일 실록 예조가 아뢰기를, “조(祖)로 일컫는 일에 대해 대신(大臣)과 의논하니, 이산해는 ‘부자(父子)가 대를 이었을 경우에는 으레 조(祖)라고 일컫지 않고 종(宗)이라고 일컬었으니 조라는 호칭을 더하는 것은 삼가 미안스러울 것 같다.’ 했고… 중략(中略)… 이항복은 ‘종(宗)이 조(祖)보다 낮고 조가 종보다 높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 신의 당초 의견이다.’ 했고, 기자헌,심희수,허욱도 ‘조라고 일컫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백사 이항복이 ‘종(宗)이 조(祖)보다 낮고 조가 종보다 높다는 뜻이 아니다’ 라고 굳이 설명하는 자체가 당시 사람들이 속으로 그런 기분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시법(諡法)에 창업하거나 다시 시작하면 조(祖)고 이어 받으면 종(宗)이다. 생가(生家)야 어찌 되었던 선조는 명종의 뒤를 이었으니 종(宗)이 맞아 대신(大臣)들 모두 그런 의견을 내었다. 그러나 나중에 광해군이 우겨서 조(祖)로 바꾼다. 광해군이야말로 적자(嫡子)도 장자(長子)도 아니어 (적자는 영창대군, 장자는 임해군) 정통성에 계속 시달렸고 사람은 그럴수록 자꾸 허세를 부리게 되니 이 경우는 조상을 조(祖)로 올리는 것이다.

광해군 즉위
광해 즉위년( 1608) 2월 2일 실록)
대신과 정원, 옥당이 다섯 번 달하여 속히 어좌에 나아갈 것을 청하니 (재삼 사양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세자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정릉동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고 나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선조가 2월 1일 승하했는데 광해군은 다음날 2월 2일 즉위하였다. 다음 왕 즉위는 소렴, 대렴이 끝나고 상복을 정식으로 입는 성복(成服) 후 -통상 닷새- 가 관례인데 대신들이 바로 오르라고 다섯 번이나 청한 것은 임란 직후 모든 것이 혼란하여 보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조선 왕의 즉위식은 보통 선왕이 돌아간 궁전의 정전 대문 앞이었다. 예를 들어 창덕궁에서 승하하면 다음 왕은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즉위했다.

선조의 인산(因山)

광해 즉위년( 1608 무신 6월 11일 실록)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이 발인하였다. 2월 승하하여 6월 발인(發靷)하니 다섯 달 만에 장사 지내라는 법도대로다. 6월 11일 발인하고 다음 날 6월 12일 하현궁(下玄宮-민간의 하관)하였다.

동구릉(東九陵) 가는 길-옛 관동대로 동구릉은 능이 아홉 개 있어 붙은 이름으로 선조의 목릉은 그 중 하나다. 동구릉 가는 길이야 다 알 터이고 옛길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

사진 : 대동여지도에 표시한 동구릉과 관동대로

흥인문 곧 동대문에서 동구릉, 구리까지 옛길은 6번 국도와 대체로 같다. 지금 직선화 되고 길이 넓어졌을 뿐이다. 중량포 지금 중량교 부근을 지나 망우리 고개에는 아직 옛길 일부와 주막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동구릉은 망우리 고개 지나 좌회전하여 들어가고, 옛 관동대로는 교문동 돌다리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한강 쪽으로 가다가 왕숙천을 잠수교로 건너 삼패동 역촌-옛 평구역(平邱驛)에서 절벽을 끼고 한강 북쪽을 따라간다.
平丘驛(평구역) 말을 가라 黑水(흑수)로 도라드니.. (정철 관동별곡)

망우리(忘憂里) 고개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사후지지로 동구릉 터를 정하고 돌아오면서 고개 위 에서 잠깐 쉬다가 "이제 모든 근심을 잃게 되었노라(忘憂矣)" 하여 고개 이름이 `망우` 가 되었다고 대개 알고 있으나 전설일 뿐이다. 정황 상 태조는 강비(康妃)의 정릉(貞陵-필자의 다른 글 정릉 참조)에 같이 묻히기를 바랬는데 무엇 하러 딴 데 보고 다니나?
태조의 건원릉을 지금 동구릉에 정한 것은 태종(太宗)이다. 옛날 이 일대 이름이 망올리(亡兀里 또는 芒兀里)였다가 발음이 바뀌고 한자로 忘憂里로 적으면서 그럴 듯한 이야기가 붙은 것이리라.

동구릉(東九陵)

동구릉 : 릉이 9개 있다.

괄호 안 묘호(廟號)중 익종(翼宗)은 귀에 설 텐데 추존왕(追尊王)으로 순조의 아들, 헌종의 아버지, 조 대비의 남편이다.

선조 처음 장지(葬地)는 지금 경릉
선조의 처음 장지는 태조의 건원릉 서쪽 유좌묘향(酉坐卯向)-정서(正西)에서 정동(正東)을 바라보는 언덕으로 구글 지도 상 헌종(憲宗)의 경릉 자리다. 그러다 22년 뒤 인조 8년 (1630) 능에서 물이 나온다는 상소가 올라 온다.

실록 인조 8년( 1630 경오 2월 4일 )
원주 목사(原州牧使)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목릉(穆陵)은 곧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영원히 계실 현궁(玄宮)인데 … 중략(中略)… 목릉은 혈도(穴道)가 우뚝 드러나고 지형이 비탈지고 험준하고 안쪽에 가려주는 산이 없어 큰 들과 평평히 맞닿아 물이 흘러나가는 곳이 곧바로 보이니, 이것은 모두가 장법에서 크게 꺼리는 것들입니다. 중략(中略)… 이에 수복(守僕)에게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술방(戌方), 자방(子方),축방(丑方) 등에 사초(莎草) 아래쪽에서 장마가 질 때면 물이 샘 솟듯 솟아난다.’ 고 하였습니다. … 중략(中略)… 장법상 이미 저토록 의심스럽고 능(陵)에 의심됨이 또 이와 같으니, 이 어찌 선왕의 체백이 안정될 땅이겠으며 종묘 사직의 혈식(血食)을 구원하게 할 도리이겠습니까…. ” 하였는데, …..
1630년 2월 4일 위 상소가 올라 오고 논의 끝에 같은 해 11월 4일 옮기려고 능을 파 보니 땅이 보송보송하여 모두 분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의론이 정해졌으니 되돌리지 않고 11월 21일 지금 자리로 천장하였다.

목릉(穆陵)

인조 때 옮겨 지금에 이르는 목릉(穆陵)은 태조의 건원릉 왼쪽 두 번째 언덕이다.

태조 건원릉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고, 능을 마주 보면 오른 쪽이 된다. 건원릉 바로 옆 -첫 번째 언덕은 태조 능의 좌청룡이라 비워 두었다. 세 번째 언덕에 선조에 앞서 떠난 원비 의인왕후 (懿仁王后) 박씨 능이 있고, 훗날 다섯 번째 언덕에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 능을 쓴다. 왕릉에 대한 기록을 읽다 보면 대개 임금은 처음 비 능을 정할 때 나중에 자기도 같이 묻힐 곳을 찾는다. 그러나 계비(繼妃)는 또 나름대로 임금 옆에 묻히기를 바란다.

선조 33년( 1600 경자 7월 25일)
….마침 이 기회에 나의 훗날 처소를 만들고 싶다…..
이상 실록 기사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을 정할 때 선조가 한 말이다.

그런데 1608년 선조대왕이 승하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광해 즉위년 ( 1608 무신 ) 2월 7일 대비전이 언서(諺書)로 비망기를 내렸다. “산릉(山陵)을 간심(看審)할 일로 나아가려 한다고 하는데 기박한 운명의 사생(死生)이 아침 저녁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대행 대왕의 원릉(園陵)을 가려서 정한 곳에다가 나의 장지(葬地)도 또한 아울러 정하라. 유교(遺敎)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다.”…..이때 대비란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다.

남편이 첫 부인 옆에 묻혔는데 후처(後妻) 또한 남편과 같이 있고 싶다면? 방법은 남편과 첫 부인 묻힌 곳에 자기(=후처)도 함께 가던지 아니면 첫 부인 옆에 있는 남편을 자기 옆으로 파 옮기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후자(後者) 남편을 파 옮긴 이는 중종 제2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였다. 필자의 다른 글 정릉(靖陵)-중종에서 쓴 것처럼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옆 (서삼능 내 희릉)에 있던 중종 능을 파헤쳐 지금 삼성동 선정릉으로 옮겨 나중 자기도 그 옆에 묻히려 했다. 그러나 옮긴 중종의 정릉(靖陵)은 비만 오면 잠겨 문정왕후는 따로 태릉에 능을 쓰니 중종만 홀아비 같이 되었다. 이에 비하면 목릉은 선조가 원대로 원비 의인왕후 옆에 묻히고 인목왕후 또한 바라던 대로 선조 옆이니 모두 윈윈하여 행복하게 된 셈이다.

금천(禁川)
동구릉에는 물이 많아 신령의 세계-왕릉을 경계 짓는 금천과 다리가 아홉 개 능 전체 입구에도 있고 각 능마다 또 있다.

목릉 금천

홍살문(紅箭門)

 

목릉의 홍살문

홍살문 너머 참도(參道)가 벋다가 중간에 왼쪽으로 휘어 정자각으로 간다. 통상 홍살문에서 정자각과 그 뒤 능상을 일직선으로 볼 수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동원이강(同原異岡)형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 세 능을 같은 구내에 언덕을 달리하여 쓴 탓이다. 능상(陵上)은 셋이지만 정자각(丁字閣)과 비각은 하나인데 선조 능 밑에 있다. 비각(碑閣)은 통상 정자각 뒤편 오른 쪽이나 셋이 공유하다 보니 앞으로 나왔다.

비각(碑閣)

 

조선국 선조대왕목릉 (朝鮮國宣祖大王穆陵)
의인왕후부중강 (懿仁王后 示+付 中岡)
인목왕후부좌강 (仁穆王后 示+付 左岡)

의인왕후 능은 가운데 언덕-중강(中岡), 인목왕후 능은 왼쪽 언덕 좌강 (左岡)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목왕후 능은 선조 능 건너 편에 있다. 우상좌하(右上左下) 왼쪽에 남편, 오른 쪽에 부인이라는 원칙에 따라 쓰다 보니 저런 표현이 나온 듯하다. 선조 왼쪽 (참배객 쪽에서 보면 오른 쪽)으로 죽 따라 가도 나오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신로(神路)

정자각에서 본 선조와 의인왕후 능상

정자각 바로 위가 선조, 오른 쪽이 의인왕후 능이다. 참도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오면서 휘었지만, 세 능으로 통하는 신로(神路) 또한 이리저리 굽어 있다. 비각에서 오른 쪽이 인목왕후 능으로 가는 신로(神路)다.

선조 능침

선조 능침 전면

좌우로 문인석과 석마가 있다. 사진에 무인석은 나오지 않으나 문인석 앞쪽이다. 중앙에 장명등과 혼유석이 있고 그 뒤 삼면을 곡장이 둘러 싸고 망주석이 새나가는 기운을 막고 있다. 가운데 능상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곡장과 능상 사이를 돌아 가며 석양과 석호가 각 2쌍 계 4쌍 8마리가 있다.

세조 이후 잠시 사라졌던 병풍석이 여전히 쳐져 있다.

십이지신(十二支神)상은 확실하나 저렇게 인물상으로 나타나니 무슨 상이 어느 동물인지 가려내기 어렵다.

선조 능침 후면

뒤로 돌아 가는 것이 능침의 전경을 보기 좋고 산세도 잘 보이나 나무가 우거져 시야를 가린다.

무인석

임란 직후라 목릉의 석물을 만들 때 솜씨 있는 석공을 구하는 데 애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인지 얼굴이 너무 크고 표정이 없다.

의인왕후(懿仁王后) 능침(陵寢)

선조 능상에서 본 의인왕후 능침. 태조 건원릉 왼쪽 (보는 쪽에서는 오른 쪽) 세 번째 언덕이다. 선조 능상과 거의 같으나 병풍석이 없다.

의인왕후 능침 전면. 병풍석은 없으나 난간석은 둘러져 있고 장명등에 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의인왕후 장명등에 처음 나온 꽃무늬는 조선 후기 왕릉에 유행이 된다.

의인왕후 능침에 올라가 사진 찍는데 벌이 좀 많고 또 열심히 돌아 다녀 살펴보니 장명등 안이 벌통이다. 벌은 특히 여자를 좋아하여 골라 쏜다. 벌이 꽃을 좇는 것은 자연의 이치니 어쩌겠는가? 화장품 냄새 때문일 테니 그 점 주의하고 또 긴 팔 입는 것이 좋다.

인목왕후(仁穆王后) 능침(陵寢)

선조가 승하하기 8년 전인 1600년 의인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2년 뒤 1602년 선조는 인목왕후를 맞으니 나이 차이는 서른 두 살이었다. 인목왕후는 1606년 영창대군을 생산한다. 영창이 비록 어리더라도 정궁 소생 적자(嫡子)니 광해군의 세자 지위가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선이 요청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관례던 고명(誥命)을 광해군 세자 책봉에 대하여는 명나라가 자꾸 늦춘다. 임란(壬亂)에 원병을 보낸 유세로 종주권을 행사하려 든 데다, 명 신종( 神宗) 이 적자(嫡子)를 폐하고 서자(庶子)로 입태자(立太子)하려 하나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친 사정이 있었다. 명(明) 예부(禮部) 에서는 비록 외국 조선이라도 적장자(嫡長子) 아닌 중서자(衆庶子)를 세우는 전례를 만들고 싶지 않아 계속 트집을 잡았다.

이에 광해군은 위기에 몰리나 얼마 뒤 선조가 승하한다. 참혹한 전쟁 직후 차마 어린아이를 세울 수 없고 또 그 동안 광해군이 쌓은 신망이 높아 임금에 오른다. 그러나 즉위 뒤에까지 명은 트집을 잡고 심지어 임해군과 대질신문까지 하려 들었다.
문제는 이때 존명(尊明) 의식이 극에 달하여 책봉이 문제가 아니라 실패하면 이를 구실로 조선 사대부들이 등을 돌릴 수가 있으니 온갖 수모를 참고 명(明)에 통사정을 하고 뇌물까지 바치며 겨우 받아 낼 수 있었다. 이렇게 즉위 한 광해군은 정통성에 대한 부담감으로 무리수를 둔다. 왕위계승에 우선권을 가졌던 적자-영창대군과 장자-임해군은 두고두고 근심덩어리니 처리해야 하나 방법이 지나쳤다.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한 뒤 증살(蒸殺-온돌에 불을 후끈 지펴 죽임) 하고 만다. 비록 참혹하지만 이 살제(殺弟)까지는 전례가 있으나, 폐모(廢母) 인목대비를 폐서인하여 서궁(덕수궁)에 가두는 것은 성리학의 나라에서 윤리상 도저히 있을 수 없으니 이것이 반정(反正)의 주요한 구실이 된다.

이리하여 광해군 재위 15년 만인 계해년 1623년 3월 13일 반정이 일어난다. 쿠데타-반정 군이 군사적으로는 신속하게 장악하지만 문제는 정통성을 여하히 세우느냐 인데 그것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 곧 인목왕후의 자교(慈敎)를 받드는 형식을 취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 인조 측에서는 인목대비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말만하면 바로 승인할 줄 알았으나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가 않았다.

인조 1년( 1623 계해 3월 13일)
상이 처음 대궐에 들어가 즉시 김자점(金自點)과 이시방(李時昉)을 보내 왕대비(王大妃)에게 반정한 뜻을 계달하자, 대비가 하교하기를 ‘10년 동안의 유폐 중에 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중에 승지와 사관(史官)도 없이 이처럼 직접 계문하는가?’ 하였다. 반정 측에서 한번 더 창덕궁으로 모시려 하나 역시 거절당한다.
이에 인조가 직접 경운궁(덕수궁)으로 가면서 광해군을 묶어 가니 인목대비의 원한에 불을 질러 빨리 반정을 승인 받으려는 뜻이었는지? ….광해를 떠메어 따르게 하였는데, …….. 상이 경운궁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서청문(西廳門) 밖에 들어가 … 쿠데타 성공해도 제일 겁나는 것이 역쿠데타로 인조 측에서는 모든 것을 빨리 기정사실화 하고 싶어 안달하지만 인목대비는 자꾸 딴청을 부린다. 군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사군이 즉위한 후 의당 종묘에 고유할 것이니, 어보를 전하는 것이 몹시 급합니다.” 하니, 자전이 이르기를, “어보를 전하는 것은 큰일이니 초라하게 예를 행할 수 없다. 명일 서청(西廳)에서 예를 갖추어 행할 것이다. 또 중국 조정의 명이 없으니 어찌 정통성이 있겠는가.
우선 국사를 임시로 서리해야 한다. 한시가 급한데 서리(署理)니 뭐니 애를 태우다 마침내 반정을 승인하면서 광해군을 죽일 것을 요청한다. 자전이 이르기를,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 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亡靈)에게 제사하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 

자전이 이르기를 “… 역괴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으며, 그 적모(嫡母)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구비하였다. 하니, 성징(聖徵)이 아뢰기를,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시해하였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 하였다. 자전이 이르기를, “사람을 죽이는데 몽둥이로 하든 칼로 하든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왕께서 병들어 크게 위독하였는데 고의로 충격을 주어 끝내 돌아가시게 하였으니 이것이 시해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부왕의 첩을 간통했다 함은 광해가 총애하던 김개시가 선조 때 궁녀였다는 말 같고 형 임해군 죽인 것과 적모는 곧 자신으로 유폐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부왕(父王) 선조를 광해군이 죽였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아 반정 측 인사가 처음 듣는다고 한 것이다. 반정이 성공한 것은 명분에서 이긴 때문인데 그걸 다 깎아먹을 광해군 처형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신하들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폐출된 임금은 신자가 감히 형륙(刑戮)으로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도한 임금으로는 걸주(桀紂) 만한 이가 없었으되 탕무(湯武)는 이를 추방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내리신 하교는 신들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원수는 쫓겨났으나 아들에 가족 다 잃고 대비 혼자 무슨 신명이 나겠는가? 남편 죽은 지 24년, 아들 잃은 지 18년 만인 인조 10년 (1632) 6월 28일 인목대비는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세상을 떠난다. 인경궁은 광해군이 짓다 만 궁전으로 지금 옥인동과 사직동 어름 일 것이다. 같은 해 10월 6일 인목대비는 태조 건원릉 왼쪽에서 다섯 번째 언덕에 선조 능을 마주보며 묻힌다.

의인왕후 능에서 바라 본 신로(神路)다. 오른 편 정자각에서 왼편으로 은 신로(神路)를 지나면 인목왕후 능이다.

의인왕후 능과 같이 병풍석은 없으나 난간석은 있다. 이하 의인왕후 능과 같으니 중복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임란이 끝난 후 30 여 년이 지나서 그런지 선조와 의인왕후 때 보다 석물 다루는 솜씨가 나아졌다.

문무인석 - 표정이 더 풍부하다.
인목왕후릉 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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