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한국인의 성질머리

멍탐정고난 2023. 6. 2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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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인산(因山)
 
광해  즉위년( 1608 무신 ) 6월 11일 실록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이 발인하였다.
 
2월 승하하여 6월 발인(發靷)하니 다섯 달 만에 장사지내라는 법도대로다. 6월 11일 발인하고 다음 날 6월 12일 하현궁(下玄宮-민간의 하관)하였다. 그런데 이 부분 실록기사에 흥미 있는 구절이 하나 붙어 있다.
 
광해 즉위년( 1608 무신 ) 6월 11일  양사가 아뢰기를,  “ 전략(前略) …. 오늘 노제(路祭)를 지낸 곳에서 제사음식을 철거할 때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각사(各司)의 하인과 군인 등이 영악에 난입하여 제사 음식을 차지하려고 하는 바람에 하나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 보니, 내관(內官)이 제사 음식을  나누어 군인들에게 주자 각 사의 하인들이 그릇을 밀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악은 음식을 나누는 장소가 아닌데 하인들로 하여금 공공연히 소란을 피우게 했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차지내관(次知內官)은 잡아다  국문하고, 주동한 하인은 유사로 하여금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내관의 일은 반우(返虞)가 지난 뒤에 잡아다 국문토록 하라.” 하였다.
 
한마디로 개판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임란 전 일본 사신이 잔치 중 후추를 (당시 후추는 비쌌다) 휙 뿌리니 기생과 악공들이 그것 줍느라 난장판이 되자 너희 나라 글렀구나 하고 탄식 내지 조롱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란 즈음 기강이 해이해져 그랬다면 이해하지만 실록에는 이런 일이 심심찮게 있다. 우선 조선 사회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무섭지가 않았다.  왕의 남자에 나오는김처선 만 해도 세조 때부터 왕의 노여움을 여러 번  사는데 내용 보면 술 마시고 헤매는 등 벌 받을 만 했다. 그러나 조금 뒤 사면되어 다시 일한다. 연산군한테 말 대답한 것도 사회가 기본적으로 겁이 없으니 가능하지 않았겠나? 오히려 현대의 박정희나 전두환 때 청와대  말단이 그랬다가는 잘리는 것은 둘째 치고 매우 얻어 터지지 않았겠나 ?
 
요즈음 경찰에 엉겨 붙는 것 보면 그 동안 공권력의 행사가 공정성을 잃은 면도 있지만, 한국인의 개기는 습성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군기 팍 드는 것은 우리 민족정서하고 잘 안 맞는 느낌이다.

왕의 남자 중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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