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임진왜란 - 0. 전쟁의 서막 (당시 한중일 3국의 군사력-국력비교)

멍탐정고난 2023. 7. 29.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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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기 한중일  3 국의 군주 왼쪽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  선조 - 이연 ,  명의 만력제 주익균

조선군

영화 "한산" 중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 일본의 요청에 따라 조선 정부는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이때 통신사가 가져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통해 조선을 침략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선조에게 조선과 명나라를 침입할 것임을 서신을 통해 알렸다. 조선통신사가 선조에게 전한 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록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오래 산다 해도 예로부터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라가 산과 바다로 막혀 멀리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한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심어 놓고, 교토의 다스림과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 것은, 앞일을 깊이 헤아린 처사이므로 이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곳의 작은 섬에 있는 무리라도 늦게 복속해 온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나온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이 굳게 될 것입니다. (기타지마, 2008: 8-9)

이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양의 아들이어서 모든 전투는 다 이긴다. 둘째, 나는 명나라를 쳐들어갈 것이다. 셋째, 조선은 일본에게 조선통신사를 통해 항복할 것임을 알렸으니 공격하지 않겠다. 하지만 명나라 정벌에 조선이 병력과 병량을 준비하고 앞장서라.

조선 조정은 발생할 전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이고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는 알지 못하였 지만, 전쟁 준비를 하였다. 일단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을 공격할 것임을 명나라에게 알렸고,1) 각 지역 방어를 각자 방어하는 진관체제를 도 단위의 지역에 군대를 모아 대단위 군대로 방어하는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했다. 동시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부 지역 지방관에게 전쟁 준비를 하라고 명을 내렸다. 비변사는 왜적은 수전에 강하나 육지로 올라오면 불리하므로 육지 방어에 힘써야 한다고 간언 하였고,이에 선조는 호남과 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케 하였다.년 2, 임진왜란 1년 전에는 신립과 이일을 남부지방에 파견하여 각 지역의 전투준비 상황을 점검하였다. 전투준비가 미약한 곳의 지방관에 대해서는 참수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변방 사정을 잘 아는 신하들을 선발하여 경상, 전라, 충청 등 하삼도를 순찰케 했다.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병기를 준비하고 성곽을 증축토록 했다. 이에 따라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의 지역에서 성곽과 참호를 증축 또는 축조하였다(김경록, 2020).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 역시 전쟁이 필연적으로 발발할 것으로 전제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거북선을 비롯한 전함을 축조하였으며, 성곽을 보수했다. 진주성에서는 김시민의 지휘하에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대포와 화약을 준비하였고, 성곽을 보수했다. 함안의 유숭인은 기마병을 양성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 따라 조선은 1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총 14만여 병력을 준비했고, 여기에 신립이 충주에 내려간 중앙군 약 8,000명을 합한 14 8,800명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보유한 총병력이다.

일본군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임진왜란 시기인 1592년 당시 일본의 총병력이나,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군사력을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15924월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참전한 일본군은 1번대에서 9번대까지 158,700명이고, 규슈의 나고야성(名護屋城)에 예비군으로 준비된 병력은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 11만 8,300명으 로 총 2828만 명이 넘는다. 2).2) 일본 측 기록에는 159241차로 1~9번대가 조선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외 부대가 조선에 상륙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일본 측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가 조선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15936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점호기록에 나고야의 예비대에 속한 대부분의 장수의 이름과 그들이 이끌던 부대의 병력수가 기록되어 있다.

즉 일본전사에 참전한 기록이 확실한 일본군 수만을 계산할 경우, 임진왜란 초기부터 참전한 일본군은 224,774명이다.

조선의 인구와 총 생산량

신용하-권태완 교수는 인구 성장률을 중심으로 계산하여 1500년대 조선의 인구는 942, 1600년 대에는 1,170만으로 집계했고 이영구-이호철 교수는 근세의 인구 증가율을 활용하여 과거로 역계산한 결과 1592년 개전 당시 인구수를만~1,400만 정도로 집계했다.

반면 페어뱅크, 라이샤워, 크레이그 교수는 호구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의 인구를 집계했고 이들은 1590년 조선의 인구를 500만으로 집계했다. 각각의 인구수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자료의 문제 때문이며 이 때문에 인구 성장률/근세의 인구 증가율 역추정/호구 조사의 결과에 따른 인구의 편차가 매우 심하며 따라서 중간 값이 700만 정도가 개전 당시 조선의 인구 수라고 보면 얼추 맞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총생산량의 경우 조선의 경지 면적이 151만 결 내외였으며 이는 50만 평방미터 정도이다. 임진왜란 전 조선의 총 농업 생산량에 대한 발표 자료는 없으나 과전법에서 최고의 풍년인 상상년 (上上年) 1 결에결에 대한 세금이 30두였고, 그 당시 전세는 10% 지불이었으니 최대 생산량은 3,000만 석이고, 이를 현대식으로 환산하면 54만 톤 정도이다.


그러나 상상년에 해당하는 작황은 드물었으므로 평균치인 중간 정도 작황으로 계산한다면 평균 2,000만 석을 매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전세만 200만 석(36,000 ton)정도를 거둔 셈인데 문제가 16세기 들어서 흉년이 들어 수확량이 크게 줄었고, 토지 겸병 문제가 겹치면서 생산량이 확 줄어들어서 실제로는 2,000만 석 이하의 총생산량을 갖추지 않았나 추정한다.

 

한 예로 조선 정부가 거두는 세금이 세종 대에 60만 석 정도였으나 성종 1년에 44만 석으로, 중종 20년에는 27만 석으로, 임진왜란 직전에는 25만 석으로 줄어들었으며 총생산량은 평균치인 2,000만 석에 못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명의 인구와 총 생산량

최근 인구 전문가인 Angus Maddison의 연구 결과로는 1580년대 명의 인구를 1 6,200만 명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명의 총생산량은 경작 토지만 무려 5,100만 정보였고 토지세로만 3,000만 석을 매년 거둬들였으니 아예 체급 자체가 다르다. 무려 조선의 85배에 해당하는 면적 크기이며 총 생산량은 확인할 정보가 없다. 다만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할 수 있고, 이 당시에도 지금의 중국과 마찬가지로 세계 최대의 인구수를 자랑했다.



일본의 인구와 총 생산량

일본의 인구는 조선이나 명에 비하여 편차가 적은 편인데, 대체적으로 1,200만에서1,800만 명 사이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인구라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 사회공학연구소에서는 1770년 일본의 인구를 1,030만으로 잡고 있고, Jean Nael Biraven 1570년 일본의 인구를 1,200만 정도로 추계하는데 특정 지역의 인구 성장률을 기초로 1600년의 인구를 추정한 결과 1,230만 정도가 계산된다.

결과적으로 1600년 일본 인구수는만, 1,800, 1,200만 설이 있는데 중간 값을 차용하자면 1,500만 정도이며 역시 중간 값을 채용한 조선에 비하여 2배 이상의 인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총 생산량 역시 210만 정보의 경작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조선의 3.5배 정도에 해당한다. 총 생산량 역시 연간 5,400만 석으로 조선의 2배 이상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조선에 비해 인구/총생산량에서 2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명은 뭐... 그냥 넘사벽이다. 이렇게 계산하고 보니 조선이 총생산량이 가장 밀리는데, 그나마도 전쟁 때문에 제대로 경작도 못하고, 세수가 25만 석에서 6~7만 석으로 떨어져 버렸다.

단지 일본의 경우 조선-명과 같은 일원화된 통일 국가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제압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저 모든 인구와 생산량을 도요토미정권이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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