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압구정(狎鷗亭)

멍탐정고난 2023. 7. 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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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한민국, 하고도 서울, 하고도 강남에서 가장 부자들이 모여 살고 온갖 유행이 다 거기서 시작된다는 압구정동은 조선 초기 세조반정-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의 기획 책임자였던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만년(晩年)에 지금 동호대교 남단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압구정이라 붙인 데서 이름이 비롯되었다.

압구정(狎鷗亭) !

익숙할 압(狎 ; 누를 압(押)이 아님)에 갈매기 구(鷗)니, 뜻으로 풀면 이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강가에서 갈매기와 벗하며 조용히 지내겠다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쿠데타를 총 감독하고, 딸 하나는 예종 비(妃), 또 하나는 예종의 조카-성종 비(妃)를 만들었던 상당부원군 한명회는 한가롭게 은퇴할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사림파(士林派)가 공론(公論)을 주도했던 조선조에서 한명회에 대한 평가는 몹시 좋지 않았고, 지금도 그 여파가 남아 교활한 모사꾼 이미지다.

이덕화 선생님의 '한명회'

그러나 나라를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만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니, 권력이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천부적 재주와 감을 가진 한명회 같은 인물이 군주에게는 꼭 필요하기도 했다. 세조(世祖)가 박정희라면 한명회는 JP 나 이후락쯤 될 텐데, 우리의 JP 도 해가 서산에 질 때 그런 것처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벌겋게 물들여 보았으면…이라고 했다던가?

그 한명회가 압구정을 지었던 동호대교 남단 일대는, 지금 온통 시멘트 고층 아파트의 숲으로 덮여있지만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경치가 괜찮았던 곳이다. 이 압구정 일대 전경을 찍으러 몇 년 전 이리저리 다녔지만 도저히 그림이 나오지 않아 포기하고 만 적이 있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항공사진
사진: 2005년 11월 필자는 강변북로에서 압구정 일대를 담아보려 했었다

위 중앙은 관악산, 중앙에 가로로 비스듬히 걸쳐 있는 다리가 동호대교고, 동호대교 남단-사진 상다리 왼쪽 끝부분의 다시 왼쪽이 옛 압구정 정자자리다. 그런데 너무 살벌하지 않은가? 날이 흐리고 저녁 때라 빛도 좋지 않았지만 빛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무슨 경치가 나오겠는가?
다 포기(抛棄)하고 겸재(謙齋)의 그림으로나 보기로 한다.

겸재정선의 압구정, 영조 17년 (1741)비단에 채색, 31.0 x 20.0 cm, 경교명승첩, 간송미술관 소장

잠실, 영동대교 쪽에서 본 시각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이 나오려면 공중에 떠서 보아야 한다. 이거 헬기를 한 대 빌려 하늘에서 보면 어떨까? 드론으로 사진 찍으면 이런 각도를 연출할 수 있을지도, 아쉽게도 드론이 없으니 다음기회에..

한가운데 팔작지붕으로 우뚝 솟은 정자가 압구정(狎鷗亭)인데 지금 위치는 동호대교 남단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이다. 한명회로부터 근 300년이 흐른 겸재 때는 누가 주인이었는지 모르겠다. 조선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 박영효 소유가 되었다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박영효가 역적이 되자 몰수되어 파괴된 채 터만 남는다. 압구정 아래로 강을 따라 언덕에 기와집과 초가 마을이 있다. 아래쪽으로 삐죽 나온 모래톱에 배 몇 척이 돛을 내리고 있고, 강에는 나룻배가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 1970년대 초 한강 개발한다고 모래 퍼내기 전에는 이랬다. 압구정에서 2시 방향으로 강 건너에 있는 산은 응봉(鷹峯)이고 그 오른쪽 아래 작은 봉우리는 무학봉(舞鶴峯) 일 것이며, 응봉, 무학봉 아래는 오늘날 옥수동, 금호동이다. 무학초등학교, 무학여고는 무학봉의 이름을 땄을 것이다. 지금 압구정에서 응봉 쪽으로 놓인 다리가 동호(東湖) 대교다. 동호라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시대 응봉을 감아 도는 한강 기슭을 두무개 또는 동호(東湖)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동호(東湖)라고 한 까닭은 강이 호수처럼 잔잔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서호(西湖)는 마포강 일대였다. 이 글을 쓰며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오늘날 동호, 서호는 잠실 석촌호수 동, 서쪽 호수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다. 다시 응봉 위로 검게 칠한 산은 남산(南山)인데 그 유명한 남산 위 저 소나무가 산꼭대기에 서 있다.

겸재의 다른 그림인 왜관수도원 그림 첩에 압구정이 또 들어있다.

사진: 압구정(狎鷗亭) , 겸재 정선, 비단에 엷은 색, 29.5x23.4cm, 왜관수도원

같은 작가 겸재가 그렸지만 솜씨가 간송본 보다 떨어지는 것 같다. 간송본과는 시점이 다르니, 한남대교 쪽에서 압구정을 본 것이 아닌가 한다. 가운데 역시 압구정 정자가 있지만, 그림 아래쪽이 한남대교 방면일 것이고 압구정을 돌아 오른쪽이 한강 본류-잠실 방면이고 위쪽 중앙에 있는 물길은 강이 아니라 중랑천인 것 같다. 그림 왼편 테두리 가운데쯤은 응봉과 무학봉일 것이고 상단 원경으로 잡힌 산들은 오른쪽부터 아차, 용마, 불암, 수락, 도봉, 삼각산일 것 같다.

사족(蛇足) :

필자는 어릴 때 신당동에 살았는데, 금호동 앞 강을 무수막강이라고 하였다. 지금 조사하니 금호동 4가에 무쇠 솥을 만들던 무쇠막이 있어서 그렇다나? 믿을 만 한지는 잘 모르겠고 하여튼 무수막강이라고 부른 것은 기억난다. 당시 우리 앞 집이 육군 준장네였는데 그 집 아들이 내 동무였다. 그때는 준장, 아니 대령도 각하라고 하였는데, 집에 와 있는 사병들이 대 여섯이 넘었다. 사병들은 모두 무슨 중사였는데, 일등중사, 이등중사가 있던 시절이라, 이 등 중 사면 아마 요즈음 병장이나 상병쯤 되지 않았나 한다. 그들이 하던 일은 머슴을 생각하면 된다. 이 머슴 중사들이 지뿌차에 추레라 달고(지프와 트레일러가 맞는 표기일 것) 가끔 쓰레기 버리러 가는 곳이 바로 무수막강-동호, 두무개였다.

그 때면 내 동무 준장아들을 태우고 가는데, 나도 차 얻어 타는 맛에 좋다고 따라간 것이다. 저 절경(絶景)에 쓰레기 버렸다니… 철없는 꼬마로서 따라간 것에 불과하지만 죄책감이 든다. 산업폐기물이 아니고, 비닐이 잘 없을 시절 생활 쓰레기였으니 금방 썩었을 것이라는데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그런데 그때는 관(官)-시(市)에서도 쓰레기를 그냥 한강에 버렸다. 변소는 모두 푸세 식이었는데, 일일이 통으로 퍼서 지게로 날라 차에 채운 다음에는 어떻게 했는지? 근교 밭에 뿌렸다고 믿고 싶지만 더러 한강에 퍼붓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왕십리역 지나 한양대부터는 모두 밭인데 봄이면 똥 냄새가 진동을 했다. 지프차 얻어 탄 것 말고도 동네 꼬마들과 산을 걸어서 넘어가기도 했다. 그 때는 평지는 좀 사는 축, 산 동네는 못 사는 사람들이 살았으니 무수막강 가는 길-산에는 맨 판잣집(판자촌)이었다. 판잣집이야 관계없지만, 겁났던 것은 산에 문둥이들이 사는데 자기들 병 고치려고 애들을 잡아 가지고는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독이 있는 곳에 약초가 있듯이 애들도 문둥이 대응책을 알고 있었다. 그건 시세를 (모래. 왜 모래를 시세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세사(細沙)의 발음이 변한 것 아닐까?) 던지면 문둥이 살에 파고드는데, 그걸 겁내고 도망간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비결(?)이지만 아무튼 애들은 그걸 믿었다. 그렇게 무수막 강가에서 종일 놀다 오면 엄마에게 야단맞곤 했는데, 그때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뒤늦게 지금 겸재의 그림을 보고 찾으려 하니 멋대가리 없는 빌딩들이 강 양쪽을 다 막아 버리고, 시멘트로 만든 강둑과 다리엔 차들만 씽씽 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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