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오봉산 청평사(五峯山 淸平寺)

멍탐정고난 2023. 6. 13.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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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봉산(五峯山) 청평사(淸平寺)로 널리 알려졌지만, 원래는 산 이름이 청평산(淸平山)이고, 절은 문수원(文殊院)이었다. 1550년 조선 명종 때 보우(普雨) 대사가 절 이름을 청평사로 바꾸면서, 산은 경운산(慶雲山)이 되다가, 근래에 들어 와 등산객들 사이에서 오봉산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사진: 대동여지도 중 일부
사진 : 구글지도

 오봉산/청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백두대간 금강산 부근에서 갈려 나오는데 산경표(山經表)에 그 맥(脈)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청평산 아래 쪽에 이름이 적힌 공작산(孔雀山)으로 오는 줄기는 오대산에서 갈라지는데 역시 산경표에 맥 이름이 없다. 조사하니 지금 청평사는 조계종 신흥사의 말사(末寺)다. 신흥사면 설악산이다. 오봉산이 산줄기 상으로는 금강산에서 갈라지니, 남북 통일 되면 청평사를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나 장안사(長安寺)에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청평사 가는 길

사진 : 소양호 인근 관광지도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봉-봉우리 다섯을 넘은 뒤 청평사로 내려온다. 그러나 나는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시원치 않은데, 산행 총무의 설명 상 산이 제법 험한 듯 하여, 배후령에서 작별하고 소양댐으로 갔다. 마침 대절한 버스가 소양댐으로 이동하여 기다린다는 계획이라, 그냥 타고 가면 되었다.

사진: 소양호에서 바라본 배후

원경(遠景)으로 잡힌 산-연봉(連峯) 중간에 움푹 파진 곳이 아마도 필자가 일행과 헤어진 배후령 일 것이다. 다른 이들이 봉우리 다섯을 오르내리느라 땀깨나 흘릴 때 필자는 유유히 배타고 소양호 호수를 건너 버렸다.

사진: 유람선에서

청평사 쪽 선착장에 도착하니 수위(水位)가 한참 내려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 : 청평사 선착장

평소 같으면 물로 덮였을 바닥이 다 드러나 있다. 봄 가뭄이 심한 모양이다.
 

당(唐)나라 공주(公主)와 상사탑(相思塔)

 
 선착장에서 다리를 지나 청평사 쪽으로 얼마간 가다 보면 오른 쪽 개울에 조형물이 나타난다.

이 조각상엔 사연이 있다.
당 태종(唐太宗)의 공주(公主)를 연모하던 총각이 있었다. 신분 상 도저히 이루지 못할 사랑이었다. 청년은 상사병으로 죽어 버리고, 뱀으로 환생하여 공주를 칭칭 감아 버린다. 뱀을 떼어 내려고 온갖 처방을 다 해보지만 소용이 없고 야위어만 간다. 부처님의 힘을 빌러 온 중국의 절을 찾아 다녀도 효험이 없었다. 공주는 마침내 머나 먼 신라까지 와서 순례하다가 청평사 아래 자리 잡는다. 청평사 계곡 굴에서 지내던 공주는 절의 종소리가 들리자 이렇게 말한다.
“절에서 밥을 얻어 올 동안만 내려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너무 힘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곧 돌아 오겠습니다.”
뱀은 웬일인지 순순히 내려 온다. 공주는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가서 정성껏 기도를 하였다. 공주가 돌아 오는 것이 늦어지자, 뱀은 찾아 나선다. 뱀이 청평사 회전문(廻轉門)을 들어서는 순간 뇌성벽력이 내려쳐 그만 죽어 버리고 폭우에 떠내려 가 버린다. 기도를 마친 공주가 절에서 밥을 얻어 돌아오는데, 자기 몸을 칭칭 휘감던 뱀이 죽어서 폭포 아래 연못에 둥둥 떠 있다. 공주는 시원한 한편으로 자기를 사모하던 뱀이 가여웠다. 이에 뱀을 위하여 탑(塔)을 세우고 당나라로 귀국했다고 한다.
뭐 이런 정도의 전설(傳說)인데…… 이 절 창건 연대가 서기 974년 광종 24년이니 당나라 태종과는 300 년 이상 시차(時差)가 있다. 당 태종 때는 청평사 절이 있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옛날에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이 있었을까? 당(唐)이 아니라, 원(元)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공주라는 변형도 있다. 이 버전의 경우 고려 말에 (나중 공주탑을 보면 알겠지만) 신라석탑을 세웠다는 어색한 일이 또 생긴다. 그러나 우물물(井水)과 강물(河水)이 서로 침범하지 않듯, 전설/신화와 역사/사실은 노는 물이 다르다. 나와바리(縄張り]가 다르니 당나라던 원나라던 따질 필요가 없다.

사진 : 당나라 공주의 프로필 사진

옆얼굴 윤곽선이 공주가 아니라 어째 총각같이 나왔다.
 

거북바위


당나라 공주 조각상 위 길가에 바위가 있는데 이름이 거북바위다.

이것 혹시 남근석(男根石)이 아닐까? 바위가 그럴 듯 하니 사람들이 열심히 이름을 새겨 놓았다.
 

 

구성폭포

공주상과 거북바위에서 얼마간 올라가면 폭포가 나온다.
 

공주 설화에서 벼락 맞고 죽은 뱀이 떠내려 오다 걸려 있었다는 폭포다. 폭포 주위는 그림 동호회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들로 그득하다. 팻말이 서 있어 읽어 보니, 원래 구송(九松)폭포 인데, 발음이 변하여 구성으로 되었다는 내용이지만, 뭐 썩 믿을 만한 설(說)은 아닌 듯 하다.
 

공주탑


구성폭포를 벗어나면 공주탑 안내판이 보인다. 청평사 올라가는 방향에서 오른 편 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이름은 또 거창하게 환희령(歡喜嶺)이다. 그 작은 언덕으로 가는 길을 돌아서자마자 탑이 보인다. 등산객들은 돌탑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덕분에 청평사 가는 길은 서로 부딪칠 정도로 붐비는데, 길에서 50m 도 채 떨어지지 않은 탑 주위는 그윽했다.

사진: 공주탑

공주가 짝사랑하던 뱀을 위하여 세웠다고 공주탑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청평사 삼층석탑(三層石塔)이고,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8호다. 상륜부(相輪部)는 언제 떨어져 나갔는지 사라져 버렸다. 고미술(古美術)에 별 조예(造詣) 없어도, 신라 석탑 양식(樣式) 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청평사 창건이 고려 광종 때면, 절 세우기 전에 이미 탑이 있었는지? 고려 초기도 탑의 형태는 신라 형식이 그대로 계속 되었는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 고려의 석탑양식은 신라이전의 지역적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조선초기 이전까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등 지역적 특성이 한민족, 한국가라는 전체적인 특성을 압도하는 역사적 배경을 보여준다. 진정한 의미의 삼한일통은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가야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즉 "고려"라는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명자체가 이미 지역적 정권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영지(影池)와 고려정원

 
우리나라 정원의 역사-庭園史 들칠 적이면 청평사가 반드시 나온다. 청평사 아래 영지(影池) 또는 남지(南池)일대가 고려 시대 정원이라는 것이다. 일본 어디 정원보다 200년 앞섰다는 둥-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안타깝게도 훼손되어 버렸다.

 
# 우리나라는 어디보다 앞섰다.. 이런말을 참 좋아하지만, 그게 큰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모두가 이집트의 아래가 되는게 아닐까? 

사진: 영지

저 못에 오봉산이 비친다고 이름이 영지(影池)다. 거북바위부터 구성폭포를 지나 청평사 절 뒤까지가 고려 시대 조성된 정원이었고, 영지가 그 중심점이라지만, 모두 망가져 그 원래 모습(原型)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다만 못의 형태가 우리나라 전통적 못 모양으로 네모 났다. 우리나라 정원의 못은 몇몇 예외를 빼고는 다 네모났다.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보통 설명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람도 또 있다. 어쨌던 다른 나라와 달리 극히 단순한 모양임은 틀림없다.
 

부도(浮屠)

이제 절에 거의 다 왔는데 길 왼편에 부도탑이 둘 있다. 안쪽 부도는 최근 것으로 각산당 석진대화상의 비 (覺山堂石眞大和尙之碑)라고 설명이 붙어 있다.

생몰연대가 각각 단기 4279년에 4323년 이다. 단기 4279년이면 서기 1946년, 4323년은 서기 1990년-21년 전이다. 단기 4283년 생인 나보다 네 살 위다. 요즈음 도구가 발달해서 그런지, 부도 조각이 제법 그럴 듯 하다. 이 각진당 석진대화상비 오른 쪽에 아주 오래 된 부도가 있다.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 부도탑

 

국사(國史) 시간에 고려 때 권신, 외척에 이자겸(李資謙: ?-1126) 이라고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은 그 이자겸의 4촌이니 당대 제일가는 세도집안-외척(外戚)이었다. 이자겸은 너무 까불다가 결국 주살(誅殺)당하지만 이자현(李資玄)은 조신하게 행동했는지 평이 나쁘지 않고 진락공(眞樂公)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받는다. 이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이 청평사에 오래 머물러, 청평사 관련 자료를 찾으면 반드시 이 이름이 나온다. 고려 정원도 이자현이 꾸민 것이라고 한다.

사진: 이자현의 부도

(*)부도와 탑은 어원이 모두 쓰투파(TSUTUPA)로 고대 인도의 무덤이다. 따라서 부도나 탑이나 같은데, 우리나라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무덤을 탑, 일반 스님의 사리를 묻으면 부도라고 굳이 구별하려 든다. 그러나 ‘부도탑’ 이라고도 부르니 이런 구분에 별 의미는 없다고 하겠다.
 

유숙의 시(詩)

 

 
식암 여기서 쉬니 만사가 뜬구름 같구나
주위와 길이 함께 고요하니 공도 장차 마음과 함께 쉬리라
하늘의 기미는 원래 적적하고, 인간 세상은 수수하기만 하다.
내가 그 쉼을 배우고자 속세에서 벗어나 강해에서 노누나


내용 좋고… 옛날에는 고요했는지 몰라도, 내가 간 날은 먼지가 풀풀 날 정도로 붐볐다. 첫머리 식암(息庵)은 앞서 말한 이자현(李資玄)의 호(號)다. 시를 지은 유숙이라는 이는 고려 말기 柳淑, 조선 중기 柳潚 중,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청평사(淸平寺)

 
드디어 청평사가 나타난다.

사진: 청평사 앞다리

새로 개축한 듯한 돌 축대가 너무 우람하다. 이제 우리는 소박한 돌담을 쌓을 정서를 영영 잃어버린 것일까?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청평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의 조형 구조는 이렇게 큰 돌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권위를 갖출 수 있다.

# 사진 상으로는 소박한 돌담으로 축대를 쌓았다가는 길 옆으로 다 무너질 각이다. 저 정도 높이의 지반을 지지하면서 왼편의 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저정도 석축 정도는 쌓아줘야할거 같은데.. 분위기상으로는 소박한 돌담길이 어울릴거 같긴하다. 권위가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인 문제라구요 아빠
 

회전문(廻轉門)


청평사는 전체적으로 육이오때 불타 새로 지었다. 그러나 회전문은 몇 차례 중수는 했지만, 기본은 1500년 중반 보우(普雨)대사 때 세운 건물이다. 보물(寶物) 제 164호다. 회전문이라고 문이 빙빙 돌아가지는 않는다.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반영하여 지은 이름이다.

사진 : 회전문

청평사 가기 전 인터넷을 뒤지니 회전문 찍은 앵글이 다 위와 같았다. 이렇게 잡는 것이 제일 그럴 듯 하다고 모두들 느꼈을 것이다. 뒤쪽으로 오봉산(五峯山)이 하늘에 닿아 있고 그 아래 절이 있으니, 하늘의 권위가 산 봉우리에 내려오고 다시 절로 이어진다. 따라서 절 규모가 소담하더라도 신자들이 마음으로 조아리며, 절 문을 들어서게 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절 건물이 거대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서양 고딕 성당같이 하늘을 찌를 듯하게 짓지 않아도 하늘과 산과 법당으로 이어지는 조형(造形) 구조상 충분히 권위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회전문은 딴 절의 사천왕문(四天王門)에 해당하여 한 때 천왕들을 모셨겠지만 지금은 없다. 문 좌우 회랑은 근래에 신축한 모양인데, 우리 전통 가람의 배치 법식과 맞지 않는다.
 

# 서양 고딕성당의 압도적인 스케일로 주는 위압감의 감동과는 다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서양 고딕성당은 자체로 권력의 상징이며,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권력의 상징으로 지어졌던 황룡사나 미륵사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사찰로 설계 되었다.  청평사 같은 경우는 권력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경운루(慶雲樓)

회전문에서 바라 본 경운루(慶雲樓) 회전문을 쳐다보며 계단을 올라 와 문을 지난 다음 다시 경운루를 우러러 보며 누마루 밑을 통과하고 누마루에서 다시 대웅전을 쳐다 보고 안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중층적(重層的)으로 계속 우러러 보면서 부처님 앞에 이르게 만드는 시각 구조는 우리나라 가람 에서 공통적이다. 경운루(慶雲樓)에서 오봉산의 옛 이름 중 하나 경운산(慶雲山)이 나왔는지? 산 이름을 따 누(樓)이름을 지었는지?
 

대웅전(大雄殿)

 
대웅전 앞마당은 달아 논 초파일 연등이 가득하다. 대웅전 건물은
최근에 지었지만 석축과 계단 소매돌은 옛날 것 같다.

대웅전
대웅전 앞 계

일요일 대웅전에는 불공이 한참이었다. 들어가 배관(拜觀)하는데, 공짜(?)로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시주도 얼마간 해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왼쪽 신자 출입구에 책상을 놓고 보살이 앉아 있는데, 어쩐지 접수 보는 수위 분위기를 풍긴다. 절 집에서 경비는 사천왕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건 이상론이고, 그 많은 등산객들이 괜히 들락거리며 분위기 흐릴까 봐 통제를 가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지만 마음 속에 거부감이 든다. 또 쳐다보는 보살도 내 얼굴을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 같아, 대웅전에 들어가는 것은 포기해 버렸다. 들어가진 않았지만 문간에서 삼존불(三尊佛)을 보니 규모도 적당하고 서로 비례도 잘 맞고 얼굴 모습도 온화하다. 법당 이름이 대웅전이니 가운데 부처님은 당연히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일 것이다.
 

극락전(極樂殿)

역시 하늘과 산(오봉산)과 법당이 연결되어 있고, 이를 신자들이 우러러 본다. 법당이 작더라도 충분히 권위를 지니고 있다. 역시 안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셨을 것이다.
 

탄연(坦然)의 글씨

 

 
앞서 한국 정원사(庭園史)하면, 청평사 고려정원이 나온다고 했지만 글씨 이야기에도 청평사가 반드시 나온다. 그건 탄연(坦然: 1061-1125)대사 때문이다. 우리나라 글씨의 시조는 신라 김생이고, 그 다음으로 탄연 대사를 꼽는다. 그 탄연 대사가 쓴 진락공 중수 문수원비(眞樂公重修文殊院碑)가 청평사에 있었다. 있었다는 과거형이다.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뜻이다. 탄연대사 글씨 파편 일부와 탁본(拓本)은 동국대와 서울대 박물관에 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진락공 중수 문수원비를 절 마당에 세워 놓았다.
 
진락공(眞樂公)은 앞서 말한 이자겸의 4촌 그 이자현(李資玄)이다. 청평사 이야기 하자면 진락공 이자현이 끊임없이 나온다. 비(碑)는 최근에 옛날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건립한 것인데 글씨 만은 남아 있는 옛 탁본을 대고 그대로 팠을 것이다.

사진: 탄연대사의 글씨 왕희지체

 

절을 대강 둘러보고 나서,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가려 했지만, 지도 상으로는 길이 있는데, 사람 다닌 흔적이 없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면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곳이다. 우리나라에 네 곳 밖에 없다는데 요새 자꾸 늘어난다. 그 네 곳도 신앙적으로는 의미가 크지만, 사실(事實, 史實)적으로는 의심쩍다.
#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는 석가모니를 화장할적에 사리가 8섬 4말이나 나왔다는 기록이 있고, 한국을 비롯해 불교 문화권 모두에 진신사리를 구해서 보관했다는 기록이 엄청나게 많다. 인간하나에게서 나온 사리가 그렇게 많이 흩어질 수 있는 지 모르겠다. 팩트체크를 할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란 얘기겠지.
 
그냥 부처님을 경배(敬拜)한다는 뜻이지, 볼거리를 찾으려면 없다.
사정이 그러니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나설 열정은 나지 않는다. 그냥 돌아서 내려오는데 식당이 즐비하다. 여긴 식당 촌과 절이 꽤 떨어져 있어 좋다. 고창 선운사 같은 곳은 전어 굽는 좌판이 절 코앞까지 이어졌는데. 길가 좌판에서 메밀 전병-부꾸미에 막걸리를 한 잔 하고 있으려니, 산에 갔던 일행이 벌써 내려 온다. 부지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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