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오감도(烏瞰圖)의 골목 (천재시인 이상을 찾아서)

멍탐정고난 2023. 6. 22.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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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烏瞰圖) : 시 제1호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오.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조선중앙일보 : 1934.7.24)


지금 읽어도 난해(難解)하니 시(詩)가 발표 된 1934년에야 독자(讀者)들의 항의가 빗발 쳤을 것은 당연한 일로 연재가 도중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태준’의 회고 (당시 조선중앙일보 문예부장)
이상의 ‘오감도’는 처음부터 말썽이었어. 원고가 공장으로 내려가자 문선부에서 「烏瞰圖」가 鳥瞰圖(조감도)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어왔어. 오감도란 말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글자라는 것이야. 겨우 설득해서 조판을 교정부로 넘겼더니 또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 나중에 편집국장에까지 진정이 들어갔지만 결국 시는 나갔어. 그 다음부터 또 문제였어. 무슨 미친 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에 가서 오감도의 원고뭉치를 불살라야 한다, 이상이란 작자를 죽여야 한다…신문사에 격렬한 독자투고와 항의들이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지. 초현실주의-쉬르레알리즘(sur-realism)이니 다다이즘(dadaism)이니 하는 해설을 들어도 잘 모르겠고 꿈 보다 해몽이 좋다고 미친 사람이 되는 대로 쓴 것을 괜히 복잡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당대인에게 모독 당했던 「오감도」연작은 그 뒤 구태의 한국문학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모더니즘 문학의 진경을 보여준 ‘앞서간 문학’으로 이상 문학을 한국문학사에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는 역작으로 평가된다. 천재(天才)던 광인(狂人)이던 오감도에는 시인(詩人)이 자란 동네가 배경으로 투영(投影)되었을 것 같다. 마침 이상(李箱)이 자라고 시를 쓴 집터가 필자(筆者)가 40년 전 다니던 모교 근처로 추억도 더듬을 겸 초 파일인 5월 24일 오전 시인의 골목을 찾아 나섰다.

 

이상(李箱)의 집터


이상(李箱)의 집터 표지판은 자하문길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 앞에 있다.

이상의 집터 표지판

그런데 정작 이상의 옛 집터는 우리은행 옆 골목을 들어가 ‘누각길’에 있다. 왜 표지판을 진짜 집터에서 떨어진 자하문로에 세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 현재 이상의집은 그를 기념하는 '이상의집'이라는 공간으로 개장해서 관람객들을 받고있다. 곧곧에 이상의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로 가득하다. 입장은 무료, 커피도 맛있는 편인듯. 아버지가 가셨을때는 아직 이렇게 되기 전이었던 듯 하다.

 

 

현재 이상의집 내부
이상의집 외부 전경

이상의 어린 시기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金海卿)(1910-1937)의 어릴 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검색해 보니 이상의 증조부는 정삼품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살펴 볼 때 중인(中人) 집안이 아닌가 한다. 이상이 난 사직동과 자라는 누각동 일대-인왕산 아랫동네는 조선 시대 ‘우대’로 부르던 곳으로 (아래대는 동대문 광희문 일대 즉 도성의 동남쪽) 중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현 배화여고 자리 필운대(弼雲臺)는 중 중인문학-위항문학(委巷文學)이 꽃 피던 곳이었다. 현대의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육당 최남선 (六堂 崔南善 1890-1957)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1901-1891)는 모두 중인출신으로 위항문학의 전통을 이은 사람들이다.

필운상화 (弼雲賞花), 영조 26년 (1750)경 종이에 엷은채색, 27.5 x 18.5 cm, 개인소장

선비들이 모여 있는 필운대(弼雲臺)아래 마을은 지금 누상동 누하동 일대니 곧 이상이 나서 자라고 시(詩)를 쓴 동네다. 그림 위 왼쪽으로 솟은 봉우리는 꼭대기가 잠두(蠶頭-누에머리) 같으니 남산이며, 그 오른 쪽 먼 산은 우면산, 또 우면산 오른 쪽은 관악산이다.
이상의 생부(生父)는 궁내부(왕실 살림을 맡던 기구) 활판소에 근무하다가 활판기계에 손가락 세 개를 잘린 뒤 이발소를 차리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았으며 얼굴이 얽었다고 한다. 어머니 또한 곰보에 성도 생일도 모르는 고아였다고 한다.

이상은 두 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伯父)에게 양자(養子)로 들어 간다. 총독부의 기술관리였던 큰아버지는 생활이 넉넉했다고 한다. 그러나 큰 어머니에게는 초혼에 실패하면서 데리고 온 자식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와 큰어머니와 이상과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되 관계가 복잡한 것은 틀림없고 이런 사정이 시인의 성장환경에 어두움을 드리웠던 것은 아닐까?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
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오감도 시제2호))

 

두칸 장방에 볕 좋은 안방은 백부, 백모,백모가 데리고 온 아이가,
좁고 햇볕이 연중 들지 않는 건넌 방은 이상과 할머니가 지냈다고 한다.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만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해지면서 나가버린다.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웃방이
즉 내 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볕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 드는 방이 내 방이요 하고 아내와 나 둘 중에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이 없다. (‘날개’ 중에서)

 

위 구절은 이상의 어릴 적 경험이 틀림없을 것 같다.

 

오감도(烏瞰圖)의 골목


이상은 학령기가 되어 신명학교를 다닌다. 이상과 구본웅은 경복궁 서쪽 동네에 이웃해 살던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두 분 모두 신명(新明)학교 1921년도 졸업생이 틀림없었다. 같은 학년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상은 젖비린내 나는 아이로 취급 받았으며 적지 않은 급우들에게 존대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신동아 2002년 11월호 : ‘구본웅과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중에서)

 

이 신명(新明) 학교 옛 자리를 체부동, 누각동, 옥인동 일대를 돌며 물었지만 ‘진명 아니고요?’ 하고 반문할 뿐 옛터는 커녕 이름도 아는 사람이 없다. 신명(新明)은 누상동에 있다가 그 뒤로 폐교되었고 그 터는 배화여고가 육영수 여사 후광을 입어 배화여대로까지 확대될 때 그 구내로 들어 간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이상의 집터와 배화여대 일대를 구글로 본다.

위 구글 지도 중 이상의집에서 배화여고를 잇는 골목들이 시인이 신명학교를 다닐 때 통학로였을 것이고 이 골목이 부지불식간에 오감도(烏瞰圖)의 배경으로 깔리지 않았을까 ??

누하동 골목길

저 골목으로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疾走)’ 했을까?
아니라면 ?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누하동 골목길

이런 골목은 막힌 것 같으면서도 길이 있고, 있는 것 같으면서 막혀 있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하다가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하고 헷갈리게 나오는 것은 이런 골목을 다니던 경험이 아닐까?

 

누하동 골목

아이들이라면 이런 골목이 무서울 수도 있겠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신명(新明) 학교

백호정터 전경

정면 위에 보이는 건물이 현 배화여고로 시인(詩人)이 다니 던 신명학교는 그 구내 어디에 있었을 것이다.

 

날개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천재(天才)'를 아시오?
나는 유쾌(愉快)하오. 이런 때 연애(戀愛)까지가 유쾌(愉快)하오.
………
그 돈 오 원을 아내 손에 쥐어 주고 넘어졌을 때에 느낄 수 있었던
쾌감을 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객들이 내 아내
에게 돈 놓고 가는 심리며 내 아내가 내게 돈 놓고 가는 심리의
비밀을 나는 알아낸 것 같아서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
집으로 가야겠다. 아내에게 불행히 내객이 있거든 내 사정을 하리라.

사정을 하면 이렇게 비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아주겠지.
부리나케 와 보니까 그러나 아내에게는 내객이 있었다…. (날개 중)

 

우리나라 최초의 심리소설이란 단편 ‘날개’를 이상은 죽기 전해 1936년 ‘조광(朝光)’에 발표한다. 이 소설-매춘부 아내와 사는 남자의 이야기 뒤에는 작가의 실재 경험이 있다고 한다. ‘오감도(烏瞰圖)’ 나 ‘날개’ 같이 헷갈리는 작품을 쓰는 사람이 월급쟁이-총독부 건축기사 일을 차분하게 할 리가 없다.

 

이상은 백부가 물려 준 유산으로 청진동에 다방 ‘제비’를 연다. 배천(白川)온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을 마담으로 앉히고 동거를 시작한다. 행복했던 이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잘 되지 않았고, 금홍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나는 금홍이의 오락을 돕기 위해 가끔 P군 (아마도 박태원)의 집에 가 잤다’ 는 것은 이상의 고백이다. 이런 이상을 금홍은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내 눈으로 절대로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냉큼 미닫이를 닫고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고 잠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둥을 짚고 섰자니까
일 초 여유도 없이 홱 미닫이가 다시 열리더니 매무새를 풀어 헤친
아내가 불쑥 내밀면서 내 멱살을 잡는 것이다.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그냥 나둥그러졌다. 그랬더니 아내는 넘어진
내 위에 덮치면서 내 살을 함부로 물어 뜯는 것이다. 아파 죽겠다.

나는 사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넙죽 엎드려 있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자니까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 아름에 덥석 안아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아무 말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것이다….
(날개 중에서)

 

이상(李箱) 약전(略傳)


이상(李箱) 1910.9.14~1937.4.17
본명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파편의 경치’를 ‘조선과 건축’ 지에 발표

1932년 동지에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를 발표. 이 때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씀.
필명(筆名) ‘이상’은 공사장 인부들이 잘 모르고 ‘이상(李樣)' 부른 대서 연유했다고 보통 알려져 있지만, 1929년의 경성고공 졸업앨범에도 이상(李箱) 이라는 필명이 나온다고 한다.
1933년 3월 객혈로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배천온천(白川溫泉)에 가 요양.

                   요양지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옴

1934년 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한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날개’를 발표.
같은 해에 ‘동해(童骸)’ ‘봉별기(逢別記)’ 등을 발표하고 폐결핵 치료를 위해 동경에 가나 불온사상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 남.
1937년 4월 동경대 부속병원에서 병사.

 

구본웅 '친구의 초상' (이상)

#아버지는 이상을 참 좋아하셨던 듯 하다. 이렇게 집터까지 찾아가 보기까지 하셨던 걸 보면. 나 역시 고등학생 시절부터 뭔가 '이상'의 글이 알 수 없지만 재미있었다. 고등학생이 읽어야할 교양도서에 가득했던 명작가의 소설중 제일 재밌었던 것은 '날개' 였다. 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위의 이상의 초상화를 직접보고 저 눈에 가득한 반항적인 느낌과 괴팍해보이는 느낌에 이상을 한동안 검색해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림은 사진보다 더 강렬하게 느낌을 전달한다. 사실 이상은 파이프담배를 자주 피우지 않았으나, 그림을 그릴 당시, 구본웅이 본인이 자주 피던 파이프담배를 물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위의 초상에는 이상만큼이나 괴팍한 천재였던 작가 구본웅의 모습도 투영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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