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광해군묘(光海君墓)

멍탐정고난 2023. 7. 1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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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지라 그 묻힌 곳의 이름은 능(陵) 도 아니고, 원(園) 도 아닌 묘(墓) 다 남양주 시청 못 미처 금곡사거리에 고종/순종황제의 릉(陵)인 홍유릉 표시가 보이면 여기서 반대편 - 사릉(思陵) 쪽으로 꺾는다. 금곡사거리에서 좌회전 받은 뒤 약 1.5km 뒤 송능삼거리가 나오고 광해군 묘는 여기서 우회전 해야 한다.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단종비(端宗妃) 송씨의 릉인 사릉(思陵이 곧 나온다)

송능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송능천을 따라 약 2km 들어가면 영락교회 (공원묘지) 돌문이 왼쪽으로 보이고 그 옆에 광해군묘 (光海君墓)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대로 영락교회 공원묘지로 들어가 약 500 m 정도 꼬불꼬불 산길을 가면 오른쪽에 광해군묘 (光海君墓) 입구가 보인다. 조금 더 가면 영락교회 공원묘지다.

내가 간 날은 철문이 열려 있으나 잠겨있는 적도 많은 듯. 인터넷에 떠 있는 방문기에는 철책을 넘어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길가에서 보이는 광해군묘 (光海君墓)

측후면사진

 

묘(墓) 조망(眺望)

도대체 터진 데가 없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사진 오른 쪽이 광해군, 왼 쪽이 부인 유씨(柳 氏)의 봉분이다.

왕릉이 아니니 봉분에는 병풍석도 난간석도 없고 무인상은 없고 문인상만 있는데 거느린 석마가 없다. 왕릉이라면 사초지 아래 비각에 있을 비가 봉분 앞에 올라와 있다. 능이라면 곡장 안에 있을 망주석이 바깥으로 나왔다. 상석은 다리가 둘로 한 쪽을 봉분 앞 장대석에 괴어 놓았다. 묘를 걸어서 재 보니 가로 28보(步) 에 세로 26 보(步)(전면 12보+봉분부분 14보) 니, 보폭(步幅) 60cm 일 때 가로x세로 17 x 15 m 정도에 넓이 255 제곱미터.

대략 80 평이 조금 못 되는 곳에 조선(朝鮮)을 15년 다스리던 군왕(君王) 부부가 누워 있는 것이다. 
이제 광해군의 정치역정을 간략히 살펴 본다. 강 양쪽의 악어 - 평가의 양극 조선 시대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은 연산과 광해군 둘이다. 연산군은 누가 보아도 쫓겨 날 만 했다. 아무리 친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황음무도하고 국정을 어지럽히면 쫓겨나야지 어쩌겠는가 ?
따라서 역사기록의 왜곡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대로 읽어도 방벌(放伐)의 정당성이 보이는 데 무엇 하러 손을 대는가 ? 그러나 광해군의 경우는 다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반정(反正) 주도세력 서인(西人)이 사필(史筆)을 잡았으니 광해군이 괜찮은 임금이라면 반정의 정당성- 자기네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

조선왕조실록(實錄)이 제 아무리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엄정한 기록이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이라 할지라도 당대의 지식인 집단 전체가 편견을 가진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광해군의 모든 업적은 부정되고 오직 폐모살제 (廢母殺弟)에 재조지은( 再造之恩)을 베푼 명나라의 은공도 몰라 본 패륜아에 궁궐을 짓는답시고 국고를 탕진하여 백성을 괴롭힌 임금으로 격하되었다.

만선사관 (滿鮮史觀)

광해군을 재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들이었으니 소위 만선사관(滿鮮史觀)이다.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한 그들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을 따돌리고 일본, 조선, 만주를 묶으려고 한 바, 광해군이 명의 원병 요청에 버티며 후금-만주정권에 유화적으로 나간 것이 그들 목적에 쓸 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광해군을 재평가할 때 ‘강 양쪽에 다 악어가 산다’ 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통성(正統性 - Legitimacy)의 위기

정통성은 정치학자면 모를까? 보통 사람이 관심 가질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 별 일을 다 겪은 한국인은 심상히 들어 넘길 수 없으니, 우리 최근정치의 고비고비는 실로 정통성의 상실 에서 온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정통성이란 바로 선거에서 나오는 데 유신 후 박정희와 그 뒤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를 했으니 정통성이 원천적으로 없었다.
정통성이 없으니 그 막강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늘 불안하여, 긴급조치 같은 말도 안 되는 포고령으로 공포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정통성이란 이런 것으로 아무리 권력을 쥐어도 이것이 없으면 늘 흔들리고, 흔들리고 불안하니 자연히 무리를 하게 된다.
광해군은 정통성(正統性) 에 문제가 있었다. 군주국가의 정통성은 혈통에서 나오니 적장자(嫡長子)로 승계해야 종법(宗法)상 문제가 없는데, 광해군은 정궁(正宮)이 아니라 후궁(後宮) 소생이니 적자(嫡子)가 아니오, 손 위에 임해군이 있으니 장자(長子)도 아니었다. 임진왜란 초기 급박한 상황에 세자(世子)가 되어 분조(分朝) 활동으로 업적을 쌓지만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생산하니 왕위 계승에 최우선권을 갖는 적자(嫡子)다.

여기에 명(明)나라에서도 세자 책봉에 애를 먹인다. 임란(壬亂)에 원병을 보낸 것을 기화로 종주권을 행사하려 든 데다. 명 신종( 神宗)이 적자(嫡子)를 폐하고 서자(庶子)로 입태자(立太子)하려 하나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친 사정이 있었다. 명(明) 예부(禮部)는 외국 조선의 경우라도 적장자(嫡長子) 아닌 중서자(衆庶子)를 세우는 전례를 만들고 싶지 않아 트집을 잡았다. 광해군은 위기에 몰리나 얼마 뒤 선조대왕이 승하하니 임란(壬亂)이라는 참혹한 전쟁 직후 아무리 영창대군이 적자(嫡子)라도 어린아이를 임금으로 세울 수는 없었고 또 그 동안 광해군이 조야에 쌓은 신망이 높았다. 결국 광해군이 즉위하나 계속 명이 트집을 잡고 심지어 임해군과 대질신문까지 하려 들었다. 문제는 이때 존명(尊明) 의식이 극에 달하여 책봉을 받지 못하면 이를 구실로 조선 사대부들이 등을 돌릴 수가 있으니 온갖 수모를 참고 뇌물을 바치며 통사정하여 겨우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광해군은 정통성에 대한 자격지심 인지 정국운영에 무리수를 두게 된다.

폐모살제 (廢母殺弟)

임금이 되긴 했지만 왕위계승에 우선권을 가졌던 적자-영창대군과 장자-임해군은 두고두고 정권에 위협이요 우환덩어리 였다. 따라서 없애야 하나 방법이 지나쳤다. 영창대군(1606-1614) 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한 뒤 마침내 증살 (蒸殺 -온돌에 불을 후끈 지펴 죽였다 함) 하고 만다.
비록 참혹하지만 이 살제(殺弟)는 전례가 있으나 폐모(廢母)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한 것은 유교-성리학의 윤리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으로 반정(反正)의 주요한 구실을 제공하고 만다.

지지층이 너무나 엷었다 !

선조 초년에 사림(士林)이 동인(東人) 서인(西人)으로 갈라진 뒤 동인(東人)은 곧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린다. 대략 남인(南人)은 퇴계(退溪) 문인(門人)으로 경상좌도(左道-낙동강 동쪽), 북인(北人)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인(門人) 우도(右道-낙동강 서쪽) 선비들에 화담 (花潭) 서경덕(徐敬德) 제자가 얼마간 섞인 형태였다.
광해군 지지세력은 북인(北人) 중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소북(小北)을 뺀 대북(大北)으로 인재 풀 이 원래 좁았다. 거기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수제자로 대북(大北)의 산림(山林)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은 꼬장꼬장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마침 다섯 성현들의 문묘배향 논의가 있었는데, 정인홍(鄭仁弘)은 이중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배향(配享)을 반대한다. (회퇴변척소 : 晦退辨斥疏) 문묘배향이란 제사 지낼 때 메와 국 한 그릇 더 얹는 차원이 아니라 그때 까지 중국 성현들만 (공자 맹자 등) 문묘에 모시다가, 조선의 성현을 모시는 것이니 그만큼 조선 유학에 자신감이 붙은 것이고 오늘 날로 말하면 국가 이데올로기 확립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회퇴 (晦退)는 들어가고 자기 스승 남명(南冥)이 빠지니 심사가 틀리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러나 회재(晦齋)와 퇴계(退溪)는 남인(南人) 곧 경상좌도(左道)에서 하늘 같이 받드는 큰 스승이니, 남인(南人)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또 서인(西人) 이 가세하여 (적의 적은 친구니까 ! ) 온 나라가 물 끓듯 하는 데 대북(大北)세력은 너무나 엷었다. 결국 회재(晦齋)와 퇴계(退溪)의 문묘배향(文廟配享) 을 막지도 못하면서 가뜩이나 지지층이 부족한 마당에 반대파만 잔뜩 늘린 셈이었다.

남명(南冥)의 학문이 실천적 성격이 강하여 임란(壬亂)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문인들이 큰 공을 세웠으니 다른 당파보다 윤리적 우월성을 가진다고 믿지 않았을까? 운동권출신에서도 이런 점이 느껴진다.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 할 때 당신들 대체 뭐 했는가? 경상좌도와 우도는 오늘 날 경상북도, 남도와 대략적으로 비슷한 데, 경북이 직설화법을 꺼리는 데 비하여 경남은 성정이 급하고 직선적인 경향이 있다.

전혀 인정 받지 못하는 업적

광해군과 대북(大北) 일파의 업적은 민생을 위하여 대동법을 시행하고, 문치 국가에서 최우선인 전적이 임란으로 상당수 불타자 다시 간행하고 외교 또한 명(明)과 후금(後金) 사이에서 조선의 이익을 최대로 챙기는 등 볼만한 것이 꽤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업적은 폐모살제 (廢母殺弟)에 묻힌다. 
대동법은 이런 종류가 늘 그렇듯이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기득권을 빼앗기는 계층은 계속 트집을 잡는 법이요 외교는 재조지은 (再造之恩)에 등 돌린 배은망덕한 패륜으로 여겨지니 폐모살제 (廢母殺弟) 와 더불어 반정의 주요한 명분으로 바뀐다.
명의 강압적 요청에 의한 요동 출병과정은 줄여도 상당히 길 수 밖에 없어 나중에 한 번 정리하기로 하나 논의를 둘러싼 대립은 오늘 날 이라크 파병과정과 너무나 닮았다. 문제는 온 나라가 당연히 보내야 하는 것으로 알고, 또 결국 보냈으니 그럴 것이면 판단을 일찍 내려 여론을 구슬렸어야 했다.

지나친 토목공사

광해군은 궁궐을 여럿 지었다. 임란(壬亂) 때 궁궐이 모두 불탔으니 창덕궁을 다시 짓는 것은 당연하나, 인경궁(仁慶宮 지금 옥인동 일대?)을 거의 다 짓다. 정원군(定遠君-인조대왕 아버지) 집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풍수 술사들의 꼬임에 중단하고 그 자리(정원군 집)에 경덕궁(= 경희궁)을 새로 지으니 무려 세 개나 지은 셈이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지나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풍수 술사들에게 쉽게 넘어간 것도 정통성이 약하여 마음이 불안한 탓도 있을 것이다.

기어코 역풍(逆風) !
광해군과 대북(大北) 정권은 다시 평가할 만 면도 있지만 잘못 또한 있으니 멀쩡한 임금을 서인이 몰아내고 누명을 씌웠다는 오늘날 유행하는 해설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정통성에 문제를 안고 있는 소수파 정권이 인기 없는 정책을 연합세력도 구하지 않고 밀어 붙이다 역풍을 맞아 침몰한 것이 바로 1623년 쿠데타 - 인조반정(仁祖反正) 이다.

결국 임진왜란의 전쟁영웅이며, 동의보감과 대동법으로 백성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광해군은 지나친 토목공사-그것도 경제적 효용성이 전혀 없는 궁궐공사에 지난친 예산을 소모하여 전후의 경제를 파탄내는 경제정책의 실패를 통해 제거되었다. 역시 그옛날이나 지금이나 경제-먹고사는 문제를 놓치면 다 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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