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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차를 따라서 (5) 청파로-삼남대로

멍탐정고난 2023. 8. 2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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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에서부터 서울역 뒤 청파로, 삼각지로 이어지는 길은 옛 삼남대로 구간으로 ‘도도로키의  삼남대로 답사기’를 (성지문화사, 2002년) 참고했다.

 

저자 도도로키 히로시(轟博志)는 1971년생 일본인으로 한국에 와 서울대 지리학과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우리 옛길을 연구하여 삼남대로 뿐 아니라, 영남대로 책도 내고 관동대로에 대하여 논문도 발표했다.

 

2년 전 이 사람이 쓴 ‘영남대로 답사기’ 와 ‘삼남대로 답사기’ 를 처음 읽었을 때 한 마디로 놀랐다. 옛날 그런 길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실재로 따라 걸으며 조사하는 외국인이 있을 줄이야. 더군다나 일본인이

 

나 포함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동안 무엇하고 있었나?

 

우리가 거대담론(巨大談論) 좋아할 때 얼핏 사소하게 보이는 일에 평생을 걸고 파고 드는 것이 일본인 기질이요 일본의 저력이 아닐까 한다.

 

전문학자가 아니니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지는 못 해도 도도로키가 기왕 밝혀 놓은 길이나마 따라 걷고 싶으나, 무릎도 시원찮고 아킬레스 건(腱)도 다친 주제라 걱정이다. 이번 시흥별로(始興別路)는 거리가 짧으니 옛 정조대왕의 행차-원행(園幸) 길도 따라 갈 겸하여 걷는 것이다.

 

삼남대로 (三南大路)

 

도도로키는 언제 춘향전까지 읽었는지 삼남대로 시작에서 인용하고 있다.

 

"…..청파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 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바삐 건너, ........"

 

이 도령은 지금 갈월동 쌍굴다리 부근에 있던 청파역에서 말을 요즈음 식으로 Call 하여 타고 남대문을 나와서는 칠패 팔패로 (염천교 칠패길 부근)로 해서 이문동 (먼저 글에서 밝힌 대로 이문은 관청을 나타내는 홍살문으로 우리나라 도처에 이문동이 있으니 꼭 청량리 밖 이문동을 생각할 필요는 없고, 옛날 서울역 근처에도 이문동이 있은 모양이다) 배다리, 돌모루(石隅 :남영역 근처)를 지나 밥전거리 (삼각지) 로 간다.

 

여기서 정조대왕의 행차는 노들로 가서 강을 건너 노량행궁에서 잠시 쉰 뒤 시흥별로-수원별로로 향하지만 이 도령은 동작진-동자기나루 (동작대교)로 가 강을 건너 여우고개(남태령)을 건너 계속 삼남대로를 갔다.

 

이 글은 정조대왕의 화성행차를 따라가는 것 인만큼 필자는 밥전거리 (삼각지)에서 이 도령을 동작진 쪽으로 떠나 보내고, 노들로 갈 것이다.

 

이 행로를 먼저 수선전도로 본다.

청파로

 

서울역에서 청파로 쪽 입구로 나오니 먼저 4편에서 밝힌 대로 일요일 오전 11시 40분이다.

 

청파로로 나온 것은 옛 삼남대로 (三南大路)가 서울역 대우빌딩 앞에서 한강대교 쪽으로 벋은 한강로가 아니라, 서울역 뒤편 청파로와 대략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초천(蔓草川) 과 염천교

염천교는 위 수선전도에는 염초교(焰硝橋)라고 나온다. 염초교(焰硝橋)는 청계천 지금 방산시장 근처에도 같은 이름의 다리가 있다. 아마도 염초청(焰硝廳 ; 조선시대 훈련도감 산하에서 화약을 만들던 관청)이 옮기면서 다리 이름도 따라 간 것이 아닌가 한다. 세월이 지나 염초청은 사람기억에 없어진 채 발음이 바뀌고 표기도 아화(雅化) 내지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염천-염천교로 바뀌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 근처 개울은 지금 복개가 되었지만 위 수선전도를 참고하면 인왕산에서 나와 청파로를 따라 흐르다가 돌모루(石隅 : 남영역) 부근에서 남산에서 나오는 물과 합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만초천(蔓草川)이지 염천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이 만초천(蔓草川)을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일본 도처에 있는 강 또는 개울 이름 욱천(旭川 : 아사히가와)로 바꾸어 버렸다.

 

아직도 행정관서에는 가끔 욱천(旭川)으로 부르는 일이 있는지 그런 것 못 참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모양으로 인터넷에 보면 항의하는 글이 더러 있다.

 

칠패시장 (七牌市場)

 

이몽룡이 숭례문 나오자마자 지나는 칠패 팔패란 바로 칠패시장으로 염천교 부근에 있었다. 경강(京)-주로 마포(麻浦) 서강(西江)을 거쳐 곡식이나 생선이 여기 모였는데, 특히 여러 가지 생선으로 유명했다.

 

칠패의 외어물전 (外魚物廛) 경주인(京主人)들은 산지에 직접 가서 사거나, 중개상인인 중도아(中徒兒)들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어물을 매점하여 시내 각처에 각종 건어물이 산처럼 쌓아 놓았다고 한다. 이들은 독점한어물의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19세기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漢陽歌)에도 ‘ 칠패 생선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라는 구절이 나온다.

 

60, 70년대에는 가죽 특히 싸구려 구두가게가 많았고, 지금은 수제화의 성지로 염천교 수제화 거리로 조성되어있다.

청파로 서북쪽 언덕을 보니 수선전도에 약현(藥峴)이라고 써 있는 곳에 약현 중림동 성당이 주변과 잘 어우러져 있다.

약현 중림동 성당

요즈음 왜 예배당을 크게만 지으려 할까?

돈은 제법 들이고 나름대로 멋도 찾으려 하는 것 같긴 한데 주변과 조화가 도대체 되지 않는다. 하긴 약현 성당은 1891년 생긴 것이니 그런 전통이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것은 아니리라.

 

아버지가 이글을 쓰실때의 2006년에는 기독교가 흥하던 시기라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지었던 추세라 이렇게 표현하신 것 같다. 요새는 기독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쇠퇴하는 추세라, 있던 예배당도 팔아야할 지경이다. 화무십일홍은 종교에도 적용이 되는 듯.

 

배다리

 

이제 청파로를 따라 걷는다. 서울역 구내가 끝나는 지점에 골목 이름이 배다리길이다. 옛날 만초천에 놓인 다리 이름을 따서 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배다리 추정 위치

청파역 (靑坡驛)

 

우리나라 역참(驛站)제도는 기록상 아득하게 신라 소지왕 9년(487) 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고구려에도 분명히 우역(郵驛)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高麗)에 들어와서는 성종 2년 (983년) 전국적 망을 갖추고, 그 뒤 몽고의 영향도 받았다. 조선시대에 들어 와 고려의 제도를 더욱 확대하니 경국대전에는 대략 전국에 약 30 리 간격으로 (옛날 10리는 경우에 따라 다른 데 4.3km 일 때도 있고, 19세기 말에는 대략 5.4 km 였다) 509개의 역을 41개의 역도로 편성한 것이 나온다.

 

역참은 이조(吏曹-행안부역할)가 아니라 병조(兵曹-국방부역할) 직할로 주변 행정조직-군현과는 직접 연결이나 상하관계가 없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마패(馬牌)는 바로 역참에서 말을 징발할 수 있는 증빙이었다.

 

"전국적으로는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41개 역도(驛道)와 540여 개의 역이 존재하여, 각 역에는 통신 및 물류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말을 기르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고, 역의 중요도에 따라 대체로 각 역에 10여 마리의 마필이 있어 전국적으로 약 5,380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말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분급된 마전(馬田) 규모는 경국대전(經國大典)상에 1마리당 큰 말은 7결(약 2만평), 중간 크기의 말은 5결 50부, 작은 말은 4결로 정도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출처 : 팜인사이트(http://www.farminsight.net)

 

역참에 말을 10마리 이상 유지보수 해야한다는 것인데, 말은 현대에서도 굉장히 비싼 동물이며 유지비도 상당히 많이 든다. 그렇다면 항상 예산부족에 시달린 조선시대에 역참은 이 예산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관청의 예산은 거의 자력갱생이다. 즉 역 주의의 땅-마전을 역참 관리에게 관리하게 하고 여기서 나오는 예산으로 역참을 유지했다. 그 유명한 암행어사가 출도할때 쓰는 마패는 바로 이 역참에서 사용하여 말을 징발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어사는 지방으로 감사를 나가야하기 때문에 역참을 지나치면서 말을 사용하며, 현지에서 탐관오리를 벌할때 동행할 군사들도 역참의 역졸들로 동원했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지명 역말,역촌동(驛村洞)이란 이 역참(驛站)이 있던 곳이다. 역(驛)에 편성된 사람들의 법적 신분은 양인(良人)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천대 받는-학술용어로 신량역천(身良役賤)에 해당하여 자기네 마을이 한때 역(驛)이었다는 것을 꺼리는 통에 연구에 애로가 있다고 한다.

 

숭례문에서 제일 가까운 역이 청파역 (靑坡驛)으로 현 위치는 갈월동 쌍굴다리 부근이라고 한다. 이몽룡은 여기서 말을 숭례문까지 부른 것이다.

옛 청파역 추정위치

 

청파역 부근에서 청파 배다리쪽을 바라본 모습

돌모루(石隅 : 남영역 부근)

 

춘향전에 나오는 돌모루는 지금 남영역 부근이다. 남영동, 남영역의 남영(南營)은 옛날 군영(軍營)이 있던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삼남대로는 밥전거리 (삼각지) 쪽으로 꺾어진다. 남영역 앞 네거리에서 한강 쪽으로 벋은 길이 있어 따라 가 보았으나 길이 막혀 있다. 다만 만초천 수구(水口)가 있어 복개된 개울이 마지막 한강으로 들어가기 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만초천 수구

따라서 나도 이몽룡을 따라 삼각지 쪽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용산 (龍山)

 

오늘 날 용산은 용산역 또는 미8군 주변을 생각하게 쉬우나 옛날 용산이라는 조그마한 산-언덕이 있었다.

 

지금 고층 건물들에 가려 산세를 파악하기 힘드나 인왕산이 무악재길마재 [鞍山=안산]로 벋고 계속 남으로 둥그재 (圓峴=원현: 충정로2가 경기대 근처), 애오개'[阿峴=아현],  큰고개[大峴=대현, 만리재]가 되고, 마포강 앞에 와서 용머리 모양 등성이 하나를 (바로 龍山) 만드니 바로 한양의 우백호다. (풍수지리의 좌청룡 우백호)

 

이 맥의 끝 부분이 용의 머리를 닮아, 용이 마포강 앞에서 강물을 마시려고 푹 숙인 모습이라 하여 '용산(龍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지금 용산 성당 부근이라고 한다.

용산 항공지도

삼각지(三角地)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배호의 삼각지

 

그 옛날 그러니까 1971년 배호(裵湖) 죽었을 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목을 놓아 울었는지 ? 당시 우리 집에 집안일을 거들어 주는 인척 누이가 있었다. 배호가 죽던 날 이 누나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음보를 터뜨리는 데, 그 뒤 그 누나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보니 그렇게 까지는 울지 않더라.

 

각설(却說)하고 삼거리라고 삼각지(三角地)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그 옛날도 네 거리였다.

 

또한 옛날 이 일대가 뻘밭이라 새펄이라 불렀는 데,  새뻘-새뿔-세뿔-삼각(三角) 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일본 애들은 원래 삼각 들어가는 이름을 좋아 한다. 삼각동, 삼각정 등등. 용산역 주변에 철로와 한강로 사이가 삼각형 땅이라서 일본인들이 삼각지로 부른 것 뿐이다.

 

밥전거리

 

 

그 옛날 삼남대로는 남영역-돌모루에서 꺾어져 들어 와 삼각지에서 동남쪽으로 가 동작진 (銅雀津 ; 동자기 나루)을 건너

여우고개 (남태령)를 넘어 과천 방향으로 갔다. 동작진 자리는 지금 동작대교 북단 부근 한강 물 속이다.

 

정조 대왕도 처음에 수원 갈 때는 삼남대로를 따라 행차했으나 후에 노들나루-장승배기로 이어지는 시흥별로를 건설하였다.

 

삼각지 로터리에는 옛날 밥집이 많았는지 ‘밥전거리’ 로 불렸다.

밥전거리

이 먹자 골목이 바로 옛 삼남대로 구간인데 지금은 끝이 미군부대로 막혀 있다. 골목 입구에 유명한 ‘참 원조 대구탕’ 간판이 보인다. 옛 밥전거리가 오늘 날 먹자골목으로 바뀐 예는 더 있으니 현재 인덕원 로터리 남동쪽에 먹자 골목이 하나 있는 데 이 또한 옛 삼남대로 구간이다.

 

필자(筆者)는 여기서 춘향이 찾아 삼남대로로 가는 이몽룡과 헤어져 한강대로를 따라 노들나루 (한강대교 부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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