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창덕궁 방문기 (2) - 인정전 -

멍탐정고난 2023. 9. 10. 15:51
반응형

창덕궁 인정전

인정문을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창덕궁의 중심건물-정전인 인정전이 나온다.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마당에 품계석이 있지만, 경복궁에 비하면 일단 마당자체의 면적이 작다. 조선 후기에는 경복궁을 복원하지 못했기 때문에 창덕궁이 법궁으로서 중요행사들을 치루게 되면서 인정전의 역할이 커졌지만, 앞마당의 면적도 작고 건물자체도 작아졌기 때문에 참석인원을 제한하는 등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마당인 조정에는 품계석이 놓여있다.  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하여 신하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품계는 정1품-종1품-정2품-종2품 순으로 18계급이지만, 정4품이후로는 종품계는 품계석이 없어서 정4품 옆에 종4품이 서는 식으로 나누어 섰기 때문에 12개가 있다. 이것은 정3품이상은 당상관이라하여, 왕을 마주하여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높은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대감'은 정1품인 영의정-좌우의정, 정2품인 6판서이며, 정3품까지는 '영감'으로 불린다. 임금은 제일 높은 '상감'마마이다.

 

이 품계석의 왕정시대의 권력구도를 알 수 있다. 왕에 가까울수록 높고 존귀하며 권력이 강한것이다. 반대로 왕과 멀어질수록 권력이 낮다. 지방관 중에서도 서울의 지방관인 한성판윤은 정2품으로 대감님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반,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 하였으며 이를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인 양반이 된다. 문무관은 임금님을 향해 바라보는게 아니라 문관은 무관을, 무관은 문관을 서로 마주보며 종렬로 서게되는데 임금님께 절을 하라고 “배(拜)-”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홀을 든채 국궁배례하며 서있는 채로 마주보며 절을 하고, 이것을 ‘곡배(曲拜)’라고 부른다.

 

건물은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맹자가 왕도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했던 '인정(仁政)'에서 따왔다. 이름 그대로 어진(仁) 정치(政)를 바탕으로 훌륭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인정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 대제학을 지닌 서영보의 글씨이다.

인정전의 월대의 귀퉁이에는 '드므'라 하는 철로 만들어진 솥같은 것이 있는데, 여기는 물을 담아놓고 화재에 대비했다고 전해지나, 조선 궁궐의 모든것이 그러하듯 실제로 화재시에 여기 있는 물로 불을 끈다기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수(水)의 기운을 두어 화(火)기를 억누르는 역할이다.

인정전 월대의 드므

인정전 상부에는 지붕꼭대기에 용마루가있고, 이위에 잡상들이 놓여있다. 인정전과 인정문의 용마루에는 오얏꽃문양(이화문양)이 구리로 달려있다. 이 문양은 대한제국 시절에 달아 놓은 것으로 일본의 영향이다. 1907년에 창덕궁으로 이어한 시기에는 이미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주권이 대부분 일본에 가있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조선의 이씨왕가가 일본천황 밑의 영주중의 하나인 것처럼 일본식의 장식을 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인정전의 용마루 - 이화문양이 달려있다.

조선은 결국 일본에 합병되고 조선왕실은 이왕가로 일본의 귀족이 된다. 고종황제, 순종황제는 나라를 지키기 보단 왕실을 지키려 하였다. 이왕가는 일본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비황족 왕작 수여 사례로, 일본은 황족을 제외한 사람에게는 왕작위를 수여한 적이 두 번밖에 없고 다른 비황족 왕작인 류큐번왕은 7년 만에 폐지되어 후작으로 강등되었으므로, 사실상 일본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 유일한 비황족 왕작이었다. 일본 황실 다음가는 대귀족인 후지와라 가문 고셋케의 당주들조차도 공작위에 머물렀다. 거기다가 이왕은 친왕급이므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왕 등 일본 왕보다 (명목상으로) 격이 더 높았고, 공족이 일본 왕과 격이 같았다. 그리고 예산도 굉장히 넉넉하게 퍼줬는데 심지어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한창 힘들었던 시기에도 이왕가의 예산을 깍은 적이 없었다.

당연히 당시에 나라를 팔아먹고 호의호식하는 이왕가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싫어했고, 우리나라가 독립할때 남북을 막론하고 왕을 다시 모셔오자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우리나라가 공화국이 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졌다.

인정전 내부

내부를 보게되면 왕의 자리 뒤편에 일월오악도가 배치된 점은 같으나,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907년 이후 3년만에 한일합방이 이 창덕궁에서 이뤄지니 이런 서양장식은 3년정도만 사용된 것이다.

 

인정전을 나와서 본격적으로 오늘의 목적인 창덕궁 후원을 향해 걸음을 옮겨본다. 

 

-다음편에-

 

 

 

 

반응형